작년에 “슬램덩크”로 모두가 열광하던 무렵, 트위터 타임라인에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와 오노 유우스케와 타치바나 케이이치로와 야부키 켄지와 카게이 시로 씨”가 같이 있는 어떤 책의 표지가 올라왔다. 그것은 2022년에 나온 요시나가 후미의 인터뷰집이었는데, 여기에 “슬램덩크”의 오랜 동인이기도 했던 작가 요시나가 후미가 대만준호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서울문화사님 제발 요시나가 후미님 인터뷰집을 정발해 주십시오”하고 기원하던 어느 날, 이번에는 은영전 파시는 분이 이 책을 언급하셨다. 설마 내 주변에 이 책 안/못 읽은 건 나 뿐인가 하고 불안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올해, 이 책이 문학동네에서 정발되었다.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트위터에서 먼저 화제가 된 부분은 “슬램덩크”와 “은하영웅전설”, 그리고 “베르사유의 장미”, 즉 요시나가 후미의 동인시절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동인시절 이야기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다만 초반부에 실로 굉장한 말이 나오는데.
“그에 비하면 저는 오타쿠치고는 라이트한 편이었다니까요?”
…….아니거든요, 선생님.
무엇보다도 저 대사, 오타쿠들만 하는 대사잖아요. 머글은 절대 저런 말 안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공식 인터뷰집에 실려서 읽고 있는 독자들을 저마다 피를 뿜고 내상으로 뒹굴게 하시다니. 하아, 정말 요시나가 후미 선생님 천재만재억재 일본만화의 신이신데 양심은 좀 부족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 문장이었다…….
일단 “요시나가 후미”의 인터뷰집인데, 인터뷰집이란 인터뷰이만 훌륭하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인터뷰어가 사심이 많으면, 웃기긴 한데 정보값이 너무 편향된 인터뷰집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이노우에 타케히코를 인터뷰한 “만화가 시작된다”라든가. (정말 인터뷰어의 덕심에는 어느정도 공감하면서도 미는 캐릭터가 다르다 보니 “아니 그렇게까지”하는 생각도 좀 들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수치스러웠던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인터뷰집이었지…….) 이번 책의 인터뷰어인 야마모토 후미코는 작가이자 편집자로 만화 정보지를 편집하기도 했고, 요시나가 후미를 여러 번 취재하고, 대담집 편집 협력도 했던 분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덕심을 표출하는 쪽이 아니라,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이해가 무척 깊고, 작품을 깊이 분석하여 질문을 던지는 분이었다. 작가의 이야기를 잘 끌어내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분, 어떤 작품에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체크해서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인터뷰어 덕분에 이 책은 요시나가 후미의 팬으로서도, 또 작가로서도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부분들, 알고 더 분석해야 할 부분들을 찾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여러 단편들이나 집사의 분수(클로드가 오베르슈타인+로이엔탈이라니, 역시 작가님 훌륭한 덕후이신 분……. 오베르슈타인과 라인하르트의 관계성 정말 좋지 않습니까) 시리즈나 오오쿠의 캐릭터 빌딩에 대해 보는 게 좋았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종관계(집사와 도련님, 치카게와 타치바나, 오오쿠의 쇼군과 그 가신, 특히 요시무네와 히사미치 등등)가 오스칼과 앙드레, 라인하르트와 키르히아이스의 관계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 팜 시리즈를 읽고 아저씨의 길에 눈을 뜨신 것이 작품 속의 30대 이상 남성 캐릭터로 연결되는 것도 흥미로웠다.즉 이 인터뷰집에서 과거의 동인 역사는, 현재 작가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분해되어 피와 살이 되었는지의 형태로 더 많이 언급된다. 그리고 후대는 그런 것을 계보로 그리게 된다. 즉 어떤 작가의 역사는 그 사람의 동인 역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어떤 작품의 좌표가, 이전의 다른 작품들과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 이 부분을 생각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또 개인사가 작품과 연결되는 부분도 재미있다. 일단 음식 이야기가 정말 매 챕터 빠지지 않고 나온다. 유치원생 때 친척집들에서 밥을 먹으며 집집마다 먹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나가 후미라든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셋이서 물만두 100개를 빚어서 먹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그의 작품 속 음식 이야기들, 특히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와 “어제 뭐 먹었어?”와 이어진다. 일에 대한 관점, 요시나가 후미가 법대에 진학한 이유도 그렇다. “어제 뭐 먹었어”의 시로 씨는 게이이자 변호사인데, 작품 중간에 청소년기에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자각한 뒤 (자신은 결혼하지 못할 것이고, 노후 대책도 혼자 세워야 하고, 또 아웃팅을 당하거나 해서 회사에서 해고될 위험도 있으니까) 자격증이 있는 전문직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이 짧지만 인상깊게 언급된다. 또 “사랑해야 하는 딸들”의 에피소드 중 중학교 때 세 친구가 “자라서 커리어우먼이 되겠다.”고 말했고, 어른이 된 뒤 그러지 못한 친구를 보며 좌절하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친구를 보며 다시 힘을 얻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평생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에서도 꽤 자주 다루어지는 심리인데, 이 부분이 이 책에서는, 약간 농담같은 에피소드와 함께 언급된다.
“아버지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분에게 하루 일과를 여쭈어 보니 오전에 법원에 잠깐 갔다가 오후 내내 골프를 치고 사우나에 들른 후 집에 간다고 알려주셨거든요. (중략) 골프 치러 다닐 시간에 만화를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의 요시나가 후미가 생각했던 변호사라는 직업, 자격증을 갖고 있으니까 회사에 고용된 상태와 달리 여성이 결혼이나 임신 출산을 하더라도 다시 일할 수 있고, 어쩌면 작가와 병행해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법대 진학으로 이끌었다. (…….) 사실 이 부분은 지금 한국의 장르 작가들도 많이 공감할 텐데, 장르, 특히 SF쪽 작가들 중에는 취업을 해서 직장에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도 그렇고. 자기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을 갖추면서도 글을 계속 쓰고 싶다, 는 생각과 여성이라고 해서 결혼이나 임신, 출산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계속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공감했다. 그리고 요시나가 후미는 변호사 겸업 작가가 되진 않았지만, 그의 그와 같은 감각은 지금, 게이인 시로 씨(어제 뭐 먹었어)에게 이어져 있다.
만화에서 “아, 이 부분 좋았는데”하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 인터뷰어가 적절히 질문해주고, 여기에 대한 작가님의 답변도 숙고를 거친 듯한 내용이어서, 다음에 언제 날을 잡고 요시나가 후미 만화 전질을 꺼내놓고 페이지 대조하고 포스트잇 붙여가며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어제저녁 어제 쓸 글을 다 써놓은 뒤 하루 모든 병렬독서를 중단하고 이 책에만 집중했는데, 이건 하루저녁 집중해서 읽을 책이 아니라 2박3일 정도 필요할 것 같았다.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는가, 작품은 어떻게 만드는가, 이 부분의 연출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공부가 되는 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정말 만화에 대해 깊이 분석해서 질문하시는 책이어서 그 방면에서도 참고가 됨. 어떤 챕터는 읽다가 “아, 이 분 정말 질문 잘 하시네.”하고 잠깐 멈춰서, 내가 만약 한국 작가님을 인터뷰한다면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하게 될까 머릿속으로 질문을 짜면서 따라갔다. 사실은 이 책이 정발이 되어서 정말 기쁘고, 읽는 내내 열광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 생각을 계속 했다. 한국 작가님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예를 들면 김진, 김혜린, 유시진, 권교정 선생님 등등)을 찾아뵙고 정말 그분들의 만화인생에 대해, 또 만화 한 편 한 편의 어떤 의미나 캐릭터 빌딩, 연출에 대해 이렇게 책 한권씩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슬슬 선생님들도 연세가 드셔서, 그런 인터뷰가 좀 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분들도 계시지 않나 싶고. 그런 기획이 있으면 나는 정말 원고료 반만 받고도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 사람은 자기 명함에 “성실한 입금 확실한 원고”같은 말을 박아넣고 다닐 만큼 원고료 수금을 칼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진정성 of the 진정성임) 정말로,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선생님들의 인터뷰집 같은 것을 보면서 매번 하는 생각이고, 오늘 특히 더 그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