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간단히 요약하면 셜록홈즈 풍의 신라 이야기다. 규격 외로 똑똑하지만 나름 점잖은 주인공과 유능하고 문무 겸비한 사이드킥, 똑똑하다 못해 살짝 비인간적인 손윗형제 등이 나오는 사극 추리물에서 연상되는 레퍼런스는 분명 이쪽이다. 하지만 셜록 홈즈가 신사이지만 괴짜였고, 때로는 자신의 추리를 드러내는 데 약간의 퍼포먼스를 가미했던 것과 달리 설자은, 아니, 미은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가 사실은 여자이고 죽은 오빠 자은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으며, 오빠가 살아있을 때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는 점이, 그의 소심해 보이는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를 세상으로 떠미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오빠 호은이다. 당나라도 유학을 가기로 정해져 있던 동생 자은이 죽자, 호은은 자은 못지 않은 누이동생 미은을 남장시켜 당나라로 보내버린다. 겨우 기회를 얻고 학비까지 지불해 놓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만이 쇠락해가는 집안을 일으킬 유일한 방법인 것 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냥 재미있어서, 흥미로워서, 미은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하는 짓인 게 뻔히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유학을 떠났던 미은, 아니 설자은이 돌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폭넓은 조사에서 비롯된 세심한 묘사와 상황 전개 덕분에 딱 한 챕터 반 만으로도 독자는 천년 전 금성의 화려한 풍경 속에 녹아든다, 무엇보다도 넷플릭스 대본을 해보시더니 챕터별로 이야기 끊고 다음 화 기대하게 만드는 스킬이 만렙을 찍으시기도 해서, 1권 마지막 페이지 넘기면서 “왜 아직 2권도 안 쓰고 1권을 냈어요 작가님 가서 일해요.” 하고 싶어진다.
성질 더러운 괴짜 천재 호은, 유학파 자은, 산학에 밝은 도은 세 남매의 관계성이 좋다. 사실 모든 버전의 마이크로프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호은을 안 좋아할 수 있나? 여기의 호은은 약사의 혼잣말에 나오는 칸라칸의 초기 묘사를 연상하게 하는데, 동양풍이라는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대놓고 사람을 장기말이나 패처럼 굴리는 인간이라는 점도 있을 것 같지만 하는 짓이 귀엽다. 똑똑하고 괴짜인데 자은에게는 그냥 성질 더러운, 하지만 동생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는 오빠라는 게 느껴지는 캐릭터다. 그리고 작가님 언제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설호은은 셜록”호움즈”에서 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1980년대 책에는 명탐정 “호움즈”로 나와 있었다) 포지션이나 괴짜인 성격은 마이크로프트인데 장남은 아니고 이름은 셜록 홈즈에서 왔단 말이지. 게다가 여동생을 밀어주는 면에서는 에놀라 홈즈의 셜록같은 느낌도 좀 있다. 다양한 모티브가 엿보여서 재미있다.
자은의 귀국길에 만나 설씨 집안의 식객으로 눌러앉은 목인곤 캐릭터도 좋다. 그는 원래대로였다면 백제에서 기술 박사를 지망했을, 당나라에서 기술을 배우고 돌아가는 유학생이었다. 하지만 유학중에 그만 나라가 망해버려렸고, 그는 자은을 따라 금성으로 와서 괴짜 삼남매가 사는 설씨 집안에서 지낸다. 서라벌(금성) 한복판에 백제인이 와서 지낸다는 설정은 사실 굉장히 자연스럽다. 서라벌은 나름 국제도시였고, 아직 백제가 남아 있을 때에도 백제의 아비지는 신라에 초빙되어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고, 무영탑 전설(아사녀 설화)에서도 탑을 세운 사람은 백제의 장인 아사달로 나온다. 나라는 다르지만 민족이 같은데다 기술과 세공이 발전한 백제인의 존재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과캐+우리와 닮은 “이방인”의 존재를 그려낸다. 그에 대한 차별도 포함해서.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요 캐릭터는 전부 똑똑해서 왕도 벌써 자은의 정체를 간파했다. 사실 왕이 주인공에게 무언가 신표가 될 만한 것을 하사하고 그야말로 왕의 이름으로 추리를 하고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하는 전개는, 암행어사 설화부터 매우 흔한 모티브지만, 그 주인공이 젊다 못해 아직 어린 여성이라는 점에서 아아, 이건 분위기는 무섭지만 “여왕폐하의 쁘띠 안제”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레이디 디텍티브에서도 빅토리아 여왕이 “그대야말로 ‘레이디 디텍티브’로다.”하고 말하는 정면은 바로 그 만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도은이 중요하게 나오는, 길쌈 내기 이야기는 신라 유리왕이 두 왕녀에게 육부를 두 패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길쌈 내기를 시켰으며, 끝난 뒤 잔치를 벌이고 회소곡을 불렀다는 이야기에서 온 것인데, 과거의 기록에서 여성이 부각된 이야기를 골라서 중요하게 쓰는 솜씨가 역시 좋다. 작가님 다음 권 내놔요, 다음 권.
PS) 잠깐 리미터 해제하고 하는 말인데 문학동네는 정세랑 작가님을 어디 호텔 통조림을 해서라도 이 시리즈를 최소 10권 이상 가급적 라이프워크로 찍어야 할 것이다. 이건 대박이 될 수 있음. 캐드펠 시리즈 처음 읽을 때의 그 맛이야. (다시 리미터 장착) 물론 작가의 인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2023년에 통조림이라니. (절레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