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고문은 1985년 9월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저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동안, 고문기술자인 이근안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 이야기는 몇년 전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 으로 다시 널리 알려졌다. 이후 5년형을 받아 2년 10개월간 수감되어 있다가 출소했지만, 다시 1990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된다.
이 책은 그 5년동안 김근태 고문과 인재근 의원(과 그 자녀들)이 주고받은 편지다. 대체로 이런 책에는 김근태 고문의 “가족과 떨어지고, 부당한 일에 자꾸 맞닥뜨리며 괴로워하는, 그러나 의연히 가족을 위로하는” 편지가 많이 실려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로 이 책은 따님이 엮었고, 이 책에 담긴 김근태 고문의 모습은 “아내를 사랑하고 딸을 사랑하며, 인간의 평등을 말하는 만큼 여성이 차별받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아빠”에 가깝다. 김병민 씨는 그런 편지들에 부쳐 이렇게 말했다.
김근태 아빠는 내가 사회로 나가면, 결혼하면 여자로서 겪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걱정했다. 혹 딸의 잘못이 아닌데 상처받거나 좌절하는 상황이 올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중략) 수배되고, 고문받고, 또 감옥에 오랜시간 계셨던 아빠를 두고도 내가 밝고 자신감있게 자란 이유는 김근태를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사랑은 날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배웠다.
편지와, 따님이 추가해놓은 글을 보다 보면 “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처럼 호칭 앞에 이름을 붙이는 묘한 표현들이 보인다. 누구의 아내이고 엄마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이 집안의 전통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특히 1991년 홍성에서 딸에게 쓴 편지는 요즘처럼 성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 김근태 고문은, 아빠가 교도소 안에서 빨래를 한다는 말에 아들이 못마땅해 하자 그에 대해 편지를 쓴다. 엄마가 빨래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아빠도 당연히 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슬그머니 엄마에게 일을 미뤘던 것에 대해 그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엄마는 가족을 사랑해서 그런 일들을 받아주지만, 엄마라고 해서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머릿속으로는 엄마와 똑같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슬며시 미루는, 여자인 엄마에게 미루는 이 사회의 오랜 습관적 회피에서 아빠 또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임을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 (중략) 사랑이란 이름으로 끝없는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땐 엄마는 아마 명백히 거절할 게다.
인재근 의원을 사랑하고, 결혼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는 평등에 대해, 결혼생활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일부일처제(아니 일부다처제가 더 맞는 말이겠지만)라는 결혼 형식은 다분히 소유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이 사회에서 여자는 피소유물이고 남자는 소유주인 것이 여러 가지로 입증되고 있지. 이와 같은 부당한 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는 없어. 얼마 전 옥순이(인재근)가 얘기한 것 아주 명쾌했어. 우리는 누구도 우리를 지배하도록 할 수는 없고, 동시에 마찬가지의 엄격함을 갖고 다른 사람을 지배해서도 안 되지. 그런 것들은 용납할 수 없어.
이 고민은 딸이 태어나며 더욱 확장되어, 그는 앞서 인용한 홍성에서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빠가 남녀 차별 문제, 여성 평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한 이유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보다 밝고 사랑스럽고, 눈물과 한숨 그리고 원한이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중략) 성별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자연의 섭리로 결정되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차별을 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병민이가 딸이기 때문에,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무시되고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는 우리 집에선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중략) 엄마와 아빠를 서로 비교하면 이것은 엄마가, 저것은 아빠가 뛰어나고, 저것은 엄마가 또 이것은 아빠가 부족하다. 전체적인 능력과 마음 등을 종합해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유전된 것을 짚어봐도 비슷하고, 엄마와 아빠가 언젠가 너희들은 김병준, 김병민이기도 하고 또 그 못지않게 인병민, 인병준이라고 강조했던 뜻이 이런 것이다.
80년대에 배울만큼 배운 운동권 진보 남성들도 또래의 운동권 여성에게 “혁명적으로 밥을 하라”며 밥이며 빨래같은 생존을 위한 돌봄노동을 떠넘기곤 했다는 이야기는 끝도 없이 나오는데, 동시대에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물 중 하나가 자녀들에게, 너희는 아빠의 아이들이지만 동시의 엄마의 아이들이며, 부부는 평등하다는 뜻을 이렇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김근태 고문 역시 그 시대의 남성이라, 마음이 나약해지는 순간에 이런 글을 아내인 인재근 의원에게 보내기도 했다. 수감중에 인재근 의원이 생일을 맞자, 그는 이런 편지를 적어 보낸다.
당신의 생일이어서 좋은 날인 오늘, 나는 자유를 돌려드리겠소. 생일선물로는 최상인 신발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 말이오. 선택의 자유,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오.
사실 이런 건 군대 간 남친들이 그 흔히 쓰는…… “마지막 뒷모습 내가 바로 멋있었어”라고 쓰고 “날 떠나지 말아줘 ㅠㅠㅠㅠㅠ” 라고 읽는 그것 아닙니까. (그렇다, 지금은 나와 결혼한 남자도 군대에 있을 때는 저런 말 쓰면서 사람 간 보고 그랬다…… 하아.) 물론 감옥이고, 군대보다 한참 더 비장한 상황이긴 하지만. 여튼 이런 글(……)에 대해 인재근 의원은 이렇게 답하셨다.
당신이 5년 형을 받고 옥 안에서 구태여 주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밖에서 계실 때도 항상 갖고 있던 나의 자유를 왜 새삼스럽게 생일 선물로 주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군요. (중략) 생일선물을 줄 수 없는 상황이면, 다시 말해서 물질적인 생일 선물을 할 수 없으면 솔직히 사랑한다고 말하지 무슨 지랄스러운 괴변이우.
우문에 현답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그보다 좀 더 뒤로 넘어가다 보면 나오는 두 분의 연애시절 편지가 나오는데, 읽다 보면 Too much Information…… 소리가 잠깐 나오기도. 🙂
‘다 그런 거지’가 아니라 ‘내 배짱 꼴리는 대로’,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군부독재와의 전쟁을 벌이고 평등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내던 인재근 의원의 편지들을 보면, “김근태 부인이 저 정도니 김근태는 오죽했으랴!”는 사람들의 말이 이해가 간다. 생각해보면 이런 투쟁을 하신 분들이나,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하셨던 분들의 부인들이 대체로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도 그렇고. 한편으로, 진보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어떤 남자들이, 여전히 성평등에 대해서는 같잖은 소리 취급하는 것을 보며, 당신들이 존경하는 그 분들의 여성관에 대해 좀 생각해 본 적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에 두 분의 명패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 김근태 고문의 편지도 그렇다. 그분이 따님께 쓰셨던, 홍성에서 보낸 편지는 정말로 교과서에라도 실려서, 진보를 외치는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30년전 그분들보다는 좀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솔직히 말하면그분의 말씀이 지금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생각보다도 한참 앞서가셔서 좀 당황스러웠다.
ps) 읽기는 사흘 전에 읽었으나, 감상은 기일에 맞춰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