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90년 백말띠의 해에 얼마나 많은 여자애들이 낙태당했는지, 뉴스에도 신문에도 나오고, 성감별 낙태하지 말라고 표어도 나오고 했었다. (근데 그게 대체로 여자애가 부족해서 남자애가 짝이 없다는 표어였다. 죽은 여자애의 입장은 전혀 없음)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내가 기억했을 정도고, 그 무렵 나왔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드센 여자가 나오는 코너 (무슨무슨 여사, 그런. 순악질 여사는 아니었다)가 그 해에만 “말띠 무슨 무슨 여사”로 명칭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수많은 여자애들이 젠더사이드당하던 해에 태어난 대단한 여자아이가 있었으니.
김연아가 백말띠생이다.
그 흔한 “당신은 베토벤을 낙태시켰습니다” 스토리에 한번 대입해 봐라.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가 될 것 같은가. 남편은 매독에, 아내는 결핵에 걸린, 아이들이 넷이 있는 집안인데 애들이 결핵으로 줄줄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낳아도 살아남을지 모르겠고 키울 상황도 안 되는 상황에서 낙태시킬거냐 말거냐, 도 아니다.
올해가 백말띠 해인데 여자애란다, 낙태시킬거냐 말거냐. 다. 기막히지 않냐고.
내가 어릴때 대구경북 출신 내 친척들은 나와 여동생을 보고 남동생 보려고 얘들을 다 낳았냐고 하고, 용띠 범띠 말띠 해에 여자애 낙태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여자애들을 다 죽여버리면 나중에 친척오빠들도, 내 남동생도 어쩌면 결혼할 여자가 없어서 결혼을 못 할 거라고 말하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결혼 못하는 건 무능한 새끼들이고 우리 집 남자들은 다 장가 잘 갈 거라고. 어이, 결혼 못 한 친척들이여, 너희의 아버지와 당숙과 기타등등 친척 아재들이 하신 말씀들이다…… (웃음)
그래, 그때도 이미 여자가 100명인데 남자가 120명, 유치원에 갔는데 여자 짝이 없다고 우는 남자애들 뉴스에 비춰주고 그랬다. 그런데도 국민학생도 생각할 수 있는 산수를 못 했지, 그 동네 아저씨들은 정말로……. 나는 딸을 낙태하지만 누군가는 내 아들을 위해 여자아이를 낳아줄 것, 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양심들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 (웃음)
드라마 M이 나왔을 때 여자애들은 한 반의 반 이상이 우리집에도 낙태당한 여동생이 있다거나 나도 낙태당할 뻔 했는데 엄마가 도망다니고 버텨서 살았다거나 태몽때문에 남자애인줄 알고 안 떼었다는 이야기들 정말 많이 했지만, 같은 또래 남자애들도 그랬나요? 세이가 나보다 한 학번 위인데, 남학교에서는 “심은하 예뻐”와 “존나 무서워” 소리만 했다고 했다. 자기네 집에 낙태한 누이가 있다는 이야기 없었다고. 왜일까? 남자애들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 잘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여자애들에게는 살려줬으니 고마워하라는 듯이 일부러 하는 집도 많았다.) 자기 엄마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으니까.
내 친척들도 동네 아주머니들도 여자애들 낙태한 이야기 애들 듣는 앞에서 태연히 했다. 우리집에도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내 남동생도 못 태어난 누나의 존재 따위 모름. 동네 남자애들을 보면 옆에서 노는데 생각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귀신같이 걸러듣더라고. 무슨 귀때기에 활성탄 필터 붙은 것 처럼. 여튼 그 낙태된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하신 대답도 기가 막힌 것이었다. 네 남동생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마치 그 애들의 찬란한 탄생설화에, 음습한 낙태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들러붙어선 안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랬다. 그랬다고. 그런데 지금의 세상에서는, 그때 죽어나간 여자애들 이야기는 안 하지, 여자가 적게 태어났다고 하지, 아직도 주도를 놓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5060이, 그 여자애들 숱하게 낙태한 아버지들의 세대니까. 너무한 것 아니냐, 진짜?
ps) 이런 이야기를 하자 다른 (남성) 작가님이 내게 물어보셨다. 낙태당한 여자아이에 대해 말하는 것과,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느냐고. 간단하다. 그 시절, 아주머니들 중에는 낙태시키려는 시부모나 남편을 피해 겨우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설령 순순히 이끌려 갔다고 해도, 그렇지 않아도 “백말띠 여자니까” “또 딸이니까” 낙태를 하자, 는 것이 임신한 어머니 개인의 독단적 판단이기만 했을 리 없다. 가부장제가, 남편과 시댁의 프레셔가 임신한 여자에게, 네가 임신한 것은 가치가 없으니 지워버리라고 강요하는 폭력의 일환이지.
한편 태어나기 전의 아이는, 일정 기간(인큐베이터의 도움을 받더라도 7개월은 넘겨야 한다. 폐성숙이 끝나 태어났을 때 인큐베이터 없이도 생존 가능한 것은 9개월 무렵이다)을 넘기기 전에는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떤 나라는 그래서, 태어나기 전의 아이에 대해서는 설령 의료사고로 사산을 당하더라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 등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또한 임신 8주까지는 “태아”도 아니고 의학적으로 “배아”다. 요즘은 임신 사실을 꽤 빨리 알 수 있고, 배아인 8주, 혹은 유산되어도 그대로 모체에 흡수되어 버리는 초기단계에 임신 사실을 알고 바로 낙태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를테면 미혼여성이 아이를 낳았을 때 안전망이 너무나 없는 나라에서, 징벌적으로 낙태 금지를 활용하는 자들이 있다. 이를테면 헤어진 전 여자친구를 겁박하기 위해서 네가 낙태한 것을 신고하겠다는, “그 태아의 생물학적 아버지”들 말이다. 혹은 “몸 함부로 굴린 여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위해” 태어날 아이의 복지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채 낙태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강간 피해자가 임신한 경우라면 예외지”하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말하던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 종종 이중잣대를 들이대는데, 불행히도 우리나라 법에서는 강간 피해자가 임신을 해도 수사가 끝날 때 까지는 합법적인 낙태는 할 수 없는 상태다.
임신의 당사자는 임신한 여성이고, 좀 넓게 보면 뱃속의 태아까지다. 임신을 유지할 것인지, 낳을 것인지, 혹은 낳지 않을 것인지는 엄밀히 말해 이들의 문제다. 임신이 여성 당사자의 몸에 일어나는 문제인데, 낳겠다는데 가족이 끌고가서 낙태를 종용하는 것도, 낳아도 키울 수 없는데 낙태하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둘 다 당사자의 권리와 의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되는 거다. 여기다 과거의 젠더사이드는 산모의 자기결정권은 물론 태아의 생명권까지 아주 적극적으로 침해한 문제이고.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 여자아이를 산모 의사에 반해서까지 낙태시키던 나라에서,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서는 낙태를 허용해선 안된다고 나오는 것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도구, 다시 말해 “가문을 잇기 위한 재생산 도구”로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말이지.
ps2) 낙태 비디오 하면 태아가 가위와 집게를 피해 도망치고 몸부림치는 무시무시한 걸 떠올리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사실 원치 않는 임신을 알아챈 단계에서 낙태를 할 때는 초기다 보니 그렇게 도망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초음파로 성감별을 하던 시기에는, 그런 건 배아 단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그 잔인한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죠. (양수검사 하느라 바늘만 찔러넣어도 태아가 움찔하니까 뭐.) 근데 초음파로 성감별을 해서 여자애니까 낙태시키는 그런 상황에서 벌어졌을 법한 영상을 들이대면서,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쌀알만한 배아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너무 치졸하지 않습니까.
ps3) 평소에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인 발언을 많이 하시던 또다른 작가님이, 이 이야기가 트위터에서 많이 나오자 “정말로 띠 때문에 여자를 낙태했다고?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놀라셨다. 그리고 왜 모르셨을지 짐작은 간다. 여자와는 달리 호랑이띠 용띠 남자들은 자기들이 그 띠라고 자랑하했으니까. 90년대 십이지 동물이 나오는 “꾸러기 수비대”가 나올 무렵 동네 초딩들들 중에는 띠 자랑하는 놈들이…… 그래서 호랑이띠도 용띠도 아니었던 남자애들이 기가 죽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호랑이 용 말띠 여자들은 너희는 팔자가 셀 것이다 운운 하는 소리는 무척 많이 들었다.
여튼 그건 하나의 방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여성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조차도 모를 만큼, “여아낙태, 혹은 여아살해”가 태어난 여자아이들에게는 “살려서 낳아줬으니 고마워하라”는 죄책감의 뿌리가, 남자아이들에게는 알 필요 없는 집안의 흑역사가 되는 분위기가, 한두 집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싶은 것. 한두 집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고, 성비가 그만큼 차이가 날 만큼 벌어진 일인데, 여전히 언론에서는 “그 시대 여자들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 그 진짜 이유는 말을 안 하고 “에, 그때는 하나 낳아 잘 키우자고 해서”하고 넘어가는 것이 참 답답하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게 계속 두루뭉술 넘어가는 바람에, 30대가 되고 40대가 된 남자들 중에도 바로 그 무렵에 여자애들이 어떻게 되었고 어떤 말을 들으며 자랐는지 모른다는 것. 이제 슬슬,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여자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여성 인구대비 출산률은 낮지 않은 상황인데도 인구 절벽이 오는 진짜 원인과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하나낳아 알뜰살뜰, 산아정책 때문에 전체 출생아동 수가 줄었던 건 사실인데 왜 그 와중에 인구는 자연성비에서 이만큼이나 멀어졌는지 좀 제대로 솔직하게 언론에서 말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여튼 참으로 야만적인 시대였습니다. 양띠들이 가득한 교실에 들어와서 너희 윗 학년은 말띠라 여자애들이 드세서 못 써먹는다. 여자는 양띠가 좋다,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중학교 선생을 하던 시대였지요.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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