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논문 참고자료] (6)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과 고전 여성문학 ; 원귀의 해원 형식과 구조의 안팎, 조현설 ( Hyun Soul Cho ),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7권, 2003 65 ~ 96쪽

  • 69쪽 “원혼형 설화 속에서 여성 자아의 위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한의 응결체인 원귀들이 원한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물론 해원의 방식은 결원(結怨)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결원이 반드시 해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주체의 태도에 따라 과거와 미래가 조정되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해원을 시도하는 원귀의 태도인 것이다.”
  • 69쪽 “결원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해원의 방식에 주목해야 원혼형 설화의 문제 지점이 분명히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 70쪽 “간접 해원은 타자를 경유한 해원이다. 원귀는 스스로 해원에 나서지 않고 해원의 중재자를 찾아가 해원을 호소한다.” (아랑형 전설)
  • 71쪽 “라깡에 따르면 상징계란 분리의 기능을 수행한다. 유아는 어머니로부터 ‘분리’ 되어야 상징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상징계는 근친상간 금지라는 문화의 명령을 체현하는 기표인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계에 거주한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이 요구하는 바를 자신의 행위 양식으로 추인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상징계 내에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욕망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71쪽 “말하기에 대한 원귀들의 욕망은 집요하다. 관리들이 죽어나가도 죽지 않는 관리가 나타날 때 까지 피를 흘리며 나타난다. 마치 원귀들은 다른 쪽에는 해원의 길이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 71쪽 “아랑의 실부는 딸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자신을 문책하며 낙향하지만 아랑은 또 다른 아버지, 다시 말해 상징적 아버지의 이름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 71~72쪽 “아랑형 설화 내에서 상징적 아버지는 질서의 표상인 국가이고, 국가를 대신하는 관리이다. 상징계 내에서의 문제 해결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문화적 질서, 다시 말해 중세에서 발원하여 근대에 이르도록 지속되고 있는 유가적 가부장제 내부에서의 해원이다. 이들의 욕망은 상징계를 구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타자 내에 고착되어 있는 듯 하다. (중략) 원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원귀는 리비도의 변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귀는 환상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계 속에서 새로 오는 관리를 만나고 죽이고, 죽이고 만나는 방식으로 현실계에 ‘관여’한다. 원귀는 환상일 수도 있고 환각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 관여하는 한 그것은 ‘실제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원귀가 실제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부분 충동과 관련된 실재적 대상인 ‘대상 a’의 드러남, 다시 말해 상징계 안에 동거하고 있던 ‘실재’의 드러남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억압되어 있던 리비도의 출현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 ‘낯선 현실’은 상징계에 위협적이다.“
  • 72쪽 “칼을 들지도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지만 원귀는 관리를 죽인다. 원귀들은 이미 존재 자체로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살해하는 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72~73쪽 “원귀의 흐름 혹은 리비도의 누출은 ‘죽지 않는 관리’의 등장으로 재빨리 봉합된다. 잠시 열렸던 실재계의 닫힘, 탈영토적 흐름의 재영토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재영토화 속에서 존재 자체로 칼이었던 여귀는 다시 칼집 안으로 포획된다. 다시 정절을 장식하는 ‘은장도’가 되는 것이다. 이 유형의 이야기가 남성들에 의해 ‘편집된’ 조선 시대 문헌들 안에 두루 수록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재영토화야말로 조선시대 가부장적 남성들, 혹은 왕조의 당연한 정치적 요구였을 테니까 말이다.”
  • 73쪽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 문을 닫는 것이, 실은 원귀 앞에서도 죽지 않는 관리가 아니라 아랑-원귀 또는 기생-원귀 자신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원귀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편집증 환자처럼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랑이든 기생이든, 원귀 아랑이든 원귀 기생이든 이들은 이미 아버자의 이름이 “네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거야”하고 제시하는 상징계의 질서를 자신의 ‘자연’으로 신체에 등록하고 있는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 해원을 통해서 재구축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고 문화적 질서일 수 밖에 없다. 해원이 끝나도 질서는 거기 건장한 사내처럼 또 다른 해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랑형 원귀설화의 대표 귀신 아랑은 ‘열녀’의 이름으로 재영토화된 오이디푸스적 주체일 뿐이다.“
  • 73쪽 주석 “아랑은 밀양 지역 권번(기생)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추모제로 이어졌고, 지금은 <아랑제>(매년 5월)라는 지역 축제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제의에서 아랑은 ‘열녀’ 아랑이다. 도청이나 교육청 등의 후원을 받아 열리는 이 축제에서는 미스코리아를 선발하듯이 정절의 상징이라는 진·선·미 아랑을 선발하고 이들이 제관이 된다. 이처럼 열녀 아랑에 매여 있는 한 아랑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재생산할 뿐이다. 이는 아랑 전설과 같은 맥락에 있는 신원형 가정소설 <장화홍련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장화와 홍련은 가부장적 국가에 신원을 호소할 뿐이다.”(“남성 지배와 장화홍련전의 여성 형상” 2003/ 조현설)
  • 74쪽 “직접 해원은 간접 해원과 달리 원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간접 해원에 보이는 대타자가 없다.” (상사뱀형 설화, 신립장군형 설화)
  • 77쪽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인 여성’이 원귀가 되어 해원을 하는 방식이다. 상사뱀형에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 귀신은 애정 또는 성욕의 대상에 달라붙어 대상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중략)“원귀들은 다른 무엇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원을 이룩한다. 그것도 부정적인 파괴의 방식으로 해원에 이르는 것이다.”
  • 77~78쪽 “아랑형이 해원을 통해 자신을 살해한 세계를 재구축했다면 이들(상사뱀형)유형들은 해원을 통해 자신을 자살에 이르게 한 세계를 파괴한다”
  • 78쪽 “아랑형 원귀설화 : 강간, 살해와 같은 범죄행위 피해자->남성질서 내에서도 남자의 행동은 위법 / 상대 남성의 윤리적 결함을 폭로함으로써 집단 내에서 비판받게 하고 뉘우치게 한다->법적 절차를 통한 해결”
    “상사뱀형, 신립장군형 원귀설화 : 남성의 윤리적 결함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법적 위반은 문제가 되지 않음 / 자살은 여성 스스로의 결정. 사법적 질서에 문제의 해결을 호소할 수 없음”
  • 78-79쪽 “원귀들의 직접 해원은 여성의 주체의 문제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상사뱀형이나 신립장군형 신원설화의 여성들 역시 아랑형에 등록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유가적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 정념의 억제를 당위로 훈육당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유가적 남성지배 사회에서 일단 통정을 하고 나면, 여성이 남성을 직접 찾아가고 나면 그때 여성은 이미 자신의 위치를 포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여성들의 행위는, 그것이 낯선 사내에게 몸을 허락한 것이든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사내를 연모한 것이든, 이미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금지’의 선을 위반한 것이 된다. 선을 넘어선 이상 여서은 자신의 애정의 대상이 된 남성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되돌아올 길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자살은 상징적 질서 안에, 다시 말해 유가적 상징계 안에 있는 여성들의 불가피한 선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해원은 상징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상징계를 넘어서려는 이들의 행위가 상징계의 질서 안에 갇힌 남성의 거부에 의해 좌절당했기 때문이다.”
  • 79-80쪽 “직접 해원에 도전하는 여귀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문화적으로 구성하고 있던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버린다. (중략) 라깡의 개념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 아래 금지되어 있던 ‘주이상스’로의 역행, 혹은 그것의 침입이 여기 있는 셈이다. (중략) 자신을 거부한 남성에 대해 견딜 수 없어 하는 여성의 자아는 상사계로의 역전이를 통해 사랑과 증오, 혹은 애정과 공격성이라는 극단적으로 대립된 정서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이중성을 특징으로 갖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모습을 연출하게 되는데 상사뱀형, 신립장군형 원귀설화의 여귀들의 증오와 공격성이 그런 것이다. 여귀들의 증오와 공격성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 쾌락 원칙을 넘어서 쾌락, 곧 주이상스의 표출인 셈이다.”
  • 81쪽 “상사뱀이나 신립의 꿈에 나타난 몽귀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이 없다. 원귀의 출현을 통해, 다시 말해 억압되어 있던 실재계(상상계)의 부분 충동들의 발현을 통해, 자신은 결혼했기 때문에 처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립의 명분은 파국에 이르고 정욕에 눈이 멀어 약속의 위반이라는 남성의 횡포를 저지른 홍 재상의 삶도 파괴된다. 원귀들의 출현에 의해 열린 실재계는, 이들 서사에서는 다시 닫히지 않는다.”
  • 81쪽 “그런데 직접 해원의 방식을 취하면서도 해원에 이르는 경루가 다른 유형들이 있다. 다시 말해 상징적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해원의 방식을 지니면서도 그 문제 제기가 굴절되는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구애형 원혼설화 가운데 신부형 전설과 좌정형 원혼설화인 황씨부인당형 전설이 그런 경우이다.”
  • 83-84쪽 “신부형 원혼설화의 신부들은 오해로 인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신랑 앞에 직접 나타나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결을 의뢰하기 위해 문제해결자 앞에 출몰하지도 않는다. 그저 온몸이 사그라질 때 까지 기다릴 뿐이다.(중략) 신부형과 유사한 각편에서 황씨부인은 새로 장가든 신랑이 낳는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일부 신부형에서는 새로 장가들어 신행을 가는 옛 신랑의 길을 비와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 막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기다림을 적극적인 의사 표현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략) 10년이나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다리기만 하는 신부나 황씨 부인의 태도에서 발견되는 것은 해원의 소극성이다.”
  • 89쪽 “승화형 상사뱀 설화에서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오히려 남성이다. 서사의 초점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완전한 남성인가를 드러내는 데 있는 것 같다”
  • 84~85쪽 “(신부형에서) 신부의 상상력은 자신의 첫 신랑에게 고착되어 있다. 이 고착을 주조한 것은, 이런 신부의 주체를 구성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어진 금지이다. 따라서 이 고착되어 불변하는 신부의 형상은 ‘해소되자 않는 의식의 응결상태’, ‘불변하는 인간 내면의 심리 구조를 대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락한 집’이라는 낡은 상징적 질서 안에 여전히 포획되어 있는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신부는 여전히 오이디푸스적 질서 안에서 ‘가해자를 기다리며’ 해원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지를 묵수하면서 금지를 넘어서려고 하는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셈이다.”“그런데 직접 해원의 방식을 취하면서도 해원에 이르는 경루가 다른 유형들이 있다. 다시 말해 상징적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해원의 방식을 지니면서도 그 문제 제기가 굴절되는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구애형 원혼설화 가운데 신부형 전설과 좌정형 원혼설화인 황씨부인당형 전설이 그런 경우이다.”
  • 87쪽 “(신부형에서) 보상 화소를 만들고, 상징적 질서를 힐문하고, 인정 투쟁에서의 승리를 이룩한 점은 인정하나.”
    “문제는 그 작은 승리가 여성들의 기다림과 희생을 남성의 출세를 위한 거름으로 인식하는 상징계의 질서, 타자의 욕망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여전히 이 상징계 혹은 남성지배의 영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화자들이 강조하는 백배사죄나 사당 배향과 같은 승리의 열매는 일종의 일시적 환영이 아니겠는가? 사그라진 신부는 무덤 속에 갇혀 있고,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부인당의 황씨부인은 ‘아들 낳기’에 영험이 있는 신격으로 사당 안에 갇혀 있으니까 말이다.”
  • 90쪽 “(승화형 상사뱀형) 이 유형의 이야기가 주로 남성 화자들에 의해 구술되고, 상사뱀 설화 가운데 각편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80% 정도)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신부형 원혼설화와 마찬가지로 남성 화자들의 욕망은 ‘무서운’ 상사뱀마저도 남성의 출세와 승리를 위한 조력자 혹은 내조자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 88쪽 “승화형의 경우도 한 처녀가 한 남성에 대한 일방적 애정으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구렁이로 변한다는 점은 파국형과 다르지 않다. 파국형과 승화형을 갈라지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남성 인물의 성격이다. 승화형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모두 역사적 인물일 뿐 아니라 구전담당층에 의해 긍정적 평가를 받는 훌륭한 인물들이다. 이순신, 강감찬, 그리고 조식 등이 그런 인물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원혼이 될 처녀들의 애정의 대상으로 설정됨으로써 상사뱀의 모습으로 돌아온 주이상스가 지닌 전복적 성격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 (89쪽 부연. 이 계열 설화에서 이순신은 처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만나려고 한다 다만 천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다(외적 조건으로 못 만남. 집안일이나 자연재해….) 따라서 이순신 장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내어줌으로써 상사뱀의 원한을, 그리고 정욕을 풀어준다. 이 경우 원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훌륭한 남성, 곧 이상적 남성을 돕는 일 뿐이다 -> 원귀가 아니라 호국용이나 신의 이미지로 전이)
  • 90쪽 “1차적으로 승화형에는 상사뱀을 생산한 구조에 대한 물음, 여성의 정욕 표현을 금기시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이순신이나 조식과 같은 남성이 처녀의 정욕을 인정하고 보듬는 방식) 그러나 승화형을 단순한 문제제기적 담론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상적인 남성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상사뱀이 지닌 전복성을 무력화시키는 담론일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상사뱀은 궤짝 속의 착한 구렁이가 되거나 이들의 출세와 승리를 돕는 신격이 되고 있지 않은가?
    승화형 : 공존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거나 화해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이야김나은 아님. 화해를 통해 상사뱀의 위험을 제거하는 이야기. 갈등 해소가 아니라 갈등의 본질을 은폐)“
  • 91쪽 “원혼은 바로 상징계 안에서 억압되어 있던, 그러나 상징계에 달라붙어 있던 오이디푸스 이전 상태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92쪽 “돌아온 원귀가 자신을 죽인 남성을 향해 직접 해원을 시도하지 않고 다른 남성, 즉 상징적 질서(아버지의 이름)에 해원을 의뢰할 때 돌아온 욕망은 현실의 구조 안에 다시 포획되고 억압된다. 대표적 신원형 원혼설화인 아랑형 전설은 바로 국가가 파견한 관리를 지속적으로 죽이는 여귀라는 위협적 존재가 어떻게 다시 남성지배의 구조 안으로 포획되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직접 해원을 시도하더라도 상사뱀형 원혼설화의 전이형과 승화형 전설들은 오히려 남성 화자들에 의해 내세워진 이상적 남성을 통해 상사뱀의 원한을 오히려 남성을 돕는 쪽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상징계를 재구축한다. (중략) 신부형이나 황씨부인당형 전설 역시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한없이 기다리는 원귀의 태도로 인해 원귀의 전복성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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