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숨죽이는 걱정의 기억

작년 여름 유어마나와 인터뷰할 때, 인터뷰어인 손지상 평론가는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물어볼 거라고 미리 말을 해 주었다. 그때 나는 그 나무위키 살생부(웃음)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던 상태였는데, 뭐 할 말은 많았지만 내겐 동업자들이 줄줄이 있지 않은가. 일단 회사들과 동업자들에게 알렸고, 인터뷰 하고나서 손지상 평론가에게 “어지간한 할 말은 다 했어도 특별히 예민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 있으면 우리 회사 보스가 보더라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만큼(물론 보스에게 보여드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순화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의 동업자들은 내가 가서 래디컬 페미니스트같은 소리를 하고 오더라도 (어차피 우리 독자들 중에는 여자가 많으니까) 매출에는 별 지장 없지 않겠는가 하고 “알아서 잘 하실 거잖아요.”라고들 하셨는데, 회사들 중 두 곳에서 나를 말렸다. 그 인터뷰 하지 말든가, 가서 페미니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그 말씀을 하신 분들이 무척 보수적인 분들이라거나, 가부장제의 화신이라거나, 그런 분들도 아니었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 여자들이었고 페미니즘에 관심도 많았다. 하지만 헛소리하다가 대대로 조리돌림 당하는 작가들도 많은데 이 민감한 시기에 페미니즘 질문하는 데랑 인터뷰하고 싶냐고 정말 걱정도 하셨다.

천만 다행히도 큰 말실수는 안 했고, 손지상님은 “말은 과격하지 않지만 씹어보면 분명히 노리고 빈정거린” 몇몇 대목들을 적당히 잘 돌려서 써주셨으며, 크게 욕도 안 먹었다. 아니, 내가 무슨 점프나 챔프에서 쓰는 것도 아니고 순정계열 매체에서 여자 독자들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가부장제의 화신이면 무슨 수로 독자들을 존중합니까. 내 독자들을 존중하려면 페미니즘에 발을 안 담글 수가 없죠. 그 이야기를 하고 왔었다. 나중에 회사들에 링크를 보내드렸고, 나의 담당님들은 “뒤에서 씹는 놈들 있을텐데 나중에 욕먹고 충격받고 앓아눕지나 말라”고 뭐라뭐라 하셨다. 그분들이 발을 담근 정도야 어떻든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나는, “아이고, 전 데뷔 전부터 먹은 욕을 생각하면 장수만세를 찍을 테니 욕먹는걸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말았다.

가끔 그 생각을 했고, 어제 특히 많이 했다. 일하는 여자들이,다른 일하는 여자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하며,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아끼는게 좋겠다고 말하는 순간에 대해서. 그리고 많이 슬퍼졌다.

ps) 이날 오후,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가 자신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여성주의적 정책들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이 페미니스트 부부셨지만, 대권주자의 유력 후보인 남성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지난 2년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왔고, 부족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보편적인 곳에 자리를 잡는 순간인 것 같았다. 물론,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신 이상 기독교인들 좀 두려워하지 말고 성소수자의 권리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서도 제발 힘과 관심을 기울여 주셨으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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