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 황선우, 김혼비, 문학동네

김혼비 작가님께서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책을 보내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도서전 첫날에 좀 들여다보고, 마지막날 사인회 끝나고 기력이 남으면 들고 와야지 하던 책들 중 하나였다. 사실 6월 초에는 책을 거의 사지 못했다. 정말 숨도 못 쉬게 바빴어서. 그러다가 도서전에 갔으니, 카드의 마그네틱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긁을까 두려워질 지경이다. 일부러 책 구입은 마지막날 하자고 카드를 봉인해 둔 것도 그 때문이긴 했는데. 어쨌든. 봉투에서 책을 꺼내고 있는데 우리집 초등학생이 제목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고……?”

그러더니 어린이는 꺼내려던 펭수 만점왕 연산 문제집을 고이 내려놓더니 가서 침대에 드러누워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

여튼 어린이의 필요 이상의 과민한 반응과 별개로, 나 역시 지금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번아웃을 떨쳐버리느라 매일 죽을 힘을 다하던 중이었다. 작가님들도 젖은 물미역처럼 늘어진 채 번아웃에 시달렸지만, 나 역시 작년부터 올해 사이에 필요 이상으로 유난스러울 정도로 마음을 앓고 있다. 작년 초여름부터 시작된,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증상은 점점 심해지더니, 이태원 참사를 전후해서 뭔가가 무너진 것 처럼 심해졌다. 우울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야말로 출근해야 할 회사가 있고 건사해야 할 아가들이 있어서 버티는 김에 마감도 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이 책에도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갑작스럽고 참혹한 비극이 내 바로 근처까지 왔었다는 감각. 정부가 방치한 죽음이 나나 내 가족의 일일 수도 있었다는 그 느낌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체념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우울증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다. (물론 안 그런 인간들은 여전히 그런 것 없이 산다. 놀러 나가서 죽은 걸 뭐 추모하냐고 비웃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가 방류될 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먹어도 안 죽는다는 소리나 하고.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여기에 지구 온난화와 전쟁,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까지 더해지며, 버텨야 하는데 그냥 뭔가 놓아버리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만난 것이었다. 마음의 무너짐을 다잡고, 꺾이는 몸을 지탱해 일으켜 세우고, 그렇다고 너무 일만 하진 말고, 김혼비 작가의 살구나무 목탁처럼, 황선우 작가와 김하나 작가의 서울 사이버 음악대(우쿨렐레와 리코더)처럼, 한군데로 너무 몰려 아집이 되어가는 마음을 풀어지게 만들 무언가를 찾아내고. 그런 구절들을 짚어가다가, 문득 그래서 내가 작년부터 올해 사이에 주말 아침 일찍 시간을 내어 배우는 바이올린 연습에 더 열심이었구나, 거기 집중하면서 다른 일을 좀 밀어내려고 했던 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한의사 친구는, 무슨 취미를 골라도 그 나이에 바이올린 같은 걸 고르느냐, 그런 걸 하니까 맨날 어깨에 담이 결리지 않느냐, 아라뱃길 가서 색소폰이라도 불든가 가서 드럼이라도 치라고 뭐라뭐라 하지만 말이다.

앞서 이 시리즈로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의 서간집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었다. 지금 보니 리뷰는 쓰지 않았는데,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좋은 이야기인데 두 사람의 편지를 붙여놓으니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 ……아니, 이건 남궁인 작가가 모가 난 사람이거나, 글을 못 쓰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다소 둔감한 부분이 실시간 반응이 이어지지 않는 편지라는 매체와는 맞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을 거다. 하긴, 네이트온과 MSN과 버디버디로 시작해서 밤이나 낮이나 메신저로 소식을 전하는 데 한없이 익숙한 상태로 2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 중에 편지 쓰기에 자신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반면 이 편지는 읽는 내내, 메신저도 이메일도 쓸 수 없는 시대, 사이좋은 두 친구가 멀리 떨어져서 서로에게 보내는 다정한 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앤의 고등학교 교장 시절을 다룬 “윈디 윌로우즈의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의 속편에서 샐리 맥브라이드의 편지들, 그리고 지경사 “캔디캔디” 3권의 편지들처럼. 문득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책 한권을 같이 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메신저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내게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당근마켓에 올라온 가방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날 밤, 인터넷에 올라왔던 영상들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고, 상을 당한 친구를 위해 수상쩍은 회사명이 적힌 화환들을 보내주는 다정한 이야기에 위로받으며, 바로 작년부터 올해 사이의 일들이 담겨 있는 이 편지들을 독자로서 엿보는 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수신자가 되어 편지를 받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번아웃과 동시대의 그 슬픔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게시됨

카테고리

,

작성자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