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SNS에서 화제인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을 보고 있다.
불운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보려는 소녀가 주인공인 원작과, 여기에 당의정 같은 낭만성을 잔뜩 불어넣은 사랑스러운 아니메 버전과는 다른 관점.
여기에는 어설픈 낭만 같은 것은 없다. 불우하게 태어나 고통받던 어린 소녀가 마침내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라는 점은 같지만, 여기에는 좀 더 현실적인 고통들이 수반된다.
이 드라마 속의 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그럼에도 뼈저린 절망을 알고 있어, 자신이 거부당한 순간 마릴라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할 만큼 큰 충격에 휩싸인다. 앤은 영리하지만 그녀의 언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남들에게는 거부감을, 본인에게는 수치심을 안겨주는 몽상이며, 초기에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과잉행동을 연상하게 한다. 앤이 예전에 일했던 집의 허버트 씨는 앤을 때리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쓰러졌고, 허버트 부인은 어린 앤의 앞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태연히 늘어놓아, 그런 것을 보고 들었던 앤은 학교에서 별 생각 없이 성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따돌림을 당하는데, 이는 앤이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이라는 학대만 당한 게 아니라 허버트 씨가 변태 성욕자일 가능성거나, 적어도 그 집에서 (최소 언어적으로라도) 성적인 학대도 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앤이 고통스러워 할 때 마다, 혹은 그 과잉행동으로 수치를 당할 때 마다, 보는 시청자들이 잠시 중단 버튼을 누르고 숨을 고르다 다시 본다고 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트위터에서도 앤을 보면서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고.
그럴 것이다. 핏줄이 아니라고 거부당하는 어린 고아, 학대당하고 환영받지 못한 어린아이, 책을 읽고 공상에 빠지는 아이가 “생쥐처럼 조용히 있겠다”고 말하는 것이, 그 애가 품었던 공상의 세계가 현실에서 얼마나 큰 괴로움으로 다가왔을지 바로 보여주는걸. 책 좋아하고, 현실이 괴로울 때 픽션 속으로 도망가고, 또래 아이들에게 배제당하고, 그런 것들이 결코 낯선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빨간머리 앤에서 낭만을 벗겨내고, 차가운 현실의 괴로움을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괴로움에서, 이 이야기의 진짜 매력이 시작된다.
“쟤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우리가 쟤한테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
마릴라와 매슈의 이 대화에서, 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릴라는 앤이 학교 선생님과 밀회하는 프리시를 보고 성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따돌림을 당한 것을 알고 처음에는 기겁을 하다가, 그 아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해하게 된다. 마릴라는 앤이 실수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하되, 그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까지 가혹하게 책임을 지우진 않는다. 그리고 매슈는 앤을 감싸고 사랑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그 아이의 작은 환상과 소망들을 가급적 부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기에는 매슈와 마릴라의 캐릭터가 좀 더 구체적이고, 배경이 충실해진 것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마릴라와 매슈는 성실한 농장주이지만 옷차림이나 가재도구 등으로 보아 이웃들에 비해 부유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보니 이웃간의 교류도 적다. 한마디로 그들은 괴짜다. 그리고 이것은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된 일도 아니다. (원작은 물론 이 드라마의 자막에도 매슈가 오빠로 나오지만 , 중간에 나오는 마릴라, 매슈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에서는 마릴라가 누나로 설정된 듯 하다) 그들에게는 젊어서 죽은 큰오빠가 있었고, 마릴라와 매슈의 어머니는 장남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라도 앤 시리즈가 계속 나와서 “잉글사이더의 리러”까지 영상화된다면 이게 어떤 식으로 변주될 지 모르겠다.) 마릴라는 젊었을 때 블라이스 씨(길버트의 아버지)와 서로 좋아했지만, 어머니의 곁을 떠날 수 없어 청혼을 거절했다. (원작에서는 성격차이로 이어지지 못했다고만 나온다.) 매슈는 학교 다닐 때 부터 단추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지니를 좋아하지만, 원래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고,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아마도 결혼하지 못하고 어머니 곁에 있는 누이 때문인지 역시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슈는 학교 다닐 때, 단추 모으는 것을 좋아하던 지니에게 단추를 준 적이 있었다. 갑자기 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 아저씨가 어떻게 그렇게 자상하게 앤을 대할 수 있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구체화된 형태로 저마다의 어둠과 아픔을 갖고 있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앤은 안정을 찾아간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어도 보육원의 화재 대응 매뉴얼을 포함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머리가 좋다보니, 앤은 루비의 집에 불이 났을 때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가 그 집의 문과 덧창을 모두 닫아 불길을 줄어들게 했고, 어른들이 주지사 선거로 도시에 간 사이 후두염으로 죽어가던 미니 메이를 훌륭하게 간호한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우등생인 길버트와 호각을 다투거나 종종 그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앤은 여자아이들의 그룹에 어느정도 받아들여지고, 또한 매슈가 쓰러지고 그린게이블즈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변함없이 커스버트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등장하는 학교 선생이 무척 밉살스럽지만, 그가 앤을 꾸짖을 때 “앤 셜리 커스버트!”하고 부르는 장면은 무척 좋다. 앤이 커스버트 집안에 정식으로 입양된 걸 몇번이나 강조해주는 연출이다.)
그렇다. 여기서 길버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머리카락이 빨갛다고 놀리다가 석판으로 스매싱을 당하는 그 길버트는, 처음부터 남자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원작에서도 길버트는 초반에 앤이 자신에게 관심을 안 보이자 관심을 끌어보려고 놀리다가 석판으로 처맞을 때 말고는 대체로 점잖고 신사적이며 앤에게 꾸준히 소년다운 연심부터 구애와 청혼에 이르기까지 정석적인 로맨스를 보여주긴 한다. (그리고 석판에 두들겨 맞은 그 순간 반했다는 무시무시한 대사를 남기기도 했지.) 하지만 이쪽은, 빨간머리 고아가 제일 똑똑한 척 하는 게 싫다는 남자애들에게 길버트가 “그 애가 똑똑한 걸 인정하지 그러냐”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아버지가 편찮으신 길버트에게 앤이 수업자료를 가져다 주거나, 결혼이나 연애같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앤이 길버트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등, 두 소년소녀가 처음부터 로맨스적 긴장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시즌제다 보니, 두 사람은 원작보다 한참 일찍 화해한다. (길버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급전개가 중간에 나오면서 앤은 자신이 말실수를 하여 길버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고, 길버트는 앤이 자신을 걱정하여 한 말에 화를 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빨간머리 앤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여성주의적이다. 이야기가 길었는데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우선 성장기 소녀가 나오다 보니 생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들과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금씩 길버트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앤은 “신부는 되고 싶지만 부인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여자애도 남자애보다 약하지 않고 농장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마릴라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앤이 학교에 들어가자, 마릴라는 마을 어머니들의 ‘진보적인 어머니’모임에 초대받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된다.
다이애나의 고모할머니인 미스 조세핀 배리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인생의 동반자라 할 만한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그 여자친구가 죽자 슬픔을 견디기 위해 에이번리 마을에서 머무른다. 그녀는 앤의 멘토가 되고, 앤과 그린 게이블즈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동정이 아닌 우정과 사랑으로 그들을 돕는다. 마릴라와 린드 부인의 오랜 우정도 그렇다. 여자가 여자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짧고 구체적으로 보여진다.
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법도 모르던 앤이, 자신이 무언가를 기도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말하는 대목은 페이건의 풍습을 인용한 것 처럼 보인다. 한편 여자아이에게 공부란 필요없으며 훌륭한 아내가 되면 족하다고 말하는 보수적이고 고루한 목사는, 불탄 루비네 집을 재건하러 온 마을 사람들이 달라붙는 가운데 혼자 말만 나불나불 하면서 앤이 가져온 빵이나 집어먹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여자애가 제일 똑똑한 척 하는 것은 싫다고 말하는 남자애들은 시종일관 길버트와 비교되며 지질하게 나온다.
시대물의 한계라는 것은 있지만, 시대물이니까 어쩔 수 없다며 “빻은 서사”를 답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선 안에서 역사왜곡이 일어나지 않는 선으로 최선을 다해 자기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한 걸음 더 앞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이번 드라마의 훌륭함을 보여주고 있다. 앤이 괴로워할 때는 보는 시청자도 괴롭긴 했으나, 다음 시즌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배우들의 성장에 맞춰서 적어도 레드먼드의 앤까지는 볼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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