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쪽 “귀신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녀)가 소속이 불확실한 ‘경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과 사의 어느 한 쪽에도 안착할 수 없는 떠돌이, 부유하는 난민이다.”
13쪽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이승과 저승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음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로 인해 이승과 저승이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서로 넘나들 수 없다는 상식은 전복된다. 귀신은 생사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이란 이원론적 구분을 조롱한다. 이제껏 현실을 지탱해 온 합리와 이성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14쪽 “귀신을 보는 일은 마치 눈을 뜬 채로 저승을 보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귀신을 목격한 자는 그 사실만으로도 귀신이 현실에 출현한 이유를 알아야 할 운명에 처한다. 목격자는 산 채로 사후 세계를 미리 체험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는 동시에, 귀신의 불운에 동참해 귀신과 운명 공동체를 이룬다. 목격자의 공포는 이러한 운명을 오직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개인성’을 확인하는 데서 증폭된다. 귀신의 요청을 거부하는 자에게 남겨지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은 산 자의 생기를 먹고 사는 사신의 기호다.”
14쪽 “귀신을 목격한 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귀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잔혹하다. 그것은 귀신의 음성이 사후 세계와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귀신이란 결국 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 낸 가학적 증거물이라는 확인에서 비롯된다. 귀신에 대한 공포는 결국 모순투성이의 잔인한 현실을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17쪽. “논어”인용. 술이편, 선진편, 옹야편
15쪽 “처녀귀신의 전통은 뿌리깊다. 그것은 15세기에 김시습이 창작한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로 거슬러 올라가며, 더 멀게는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수이전』에 수록된 「최치원」으로 소급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모두 여성이고, 스무 살이 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를 가로막는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자결한 슬픈 사연의 주인공들이다. 그 때문에 귀신은 공포에 앞서 슬픔을, 분노보다 큰 애상감을 불러온다. 이들은 오직 순수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먼 옛날, 귀신은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으며,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처녀귀신은 꿈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이었지만, 죽은 뒤에야 그 꿈을 이룬 소망의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다.”
15쪽 “고소설에서 자살한 여성 인물이 환생하는 비율은 31% 정도다. 자살한 남성 인물이 환생하는 이야기는 한 편도 없다. 이 중에서 자살한 원귀의 환생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김인향전」, 「유치현전」, 「장화홍련전」, 「접동새」, 「정을선전」 등 5편이 확인된다.”
16쪽 “처녀귀신은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죽음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전복시킴으로써 공포의 표상이 되었다.”
16쪽 “한국 문화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죽음의 형식은 노화의 궁극적 지점에서 맞는 자연사다. 처녀귀신이란 이에 대한 욕망과 기대를 일시에 배반한 불온한 문화 기호로 자리매김한다. 여성에게 혼례란 성인식과 동일시되었으므로, 처녀귀신은 미처 성인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실패자의 표상이기도 했다.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귀신의 슬픔이 ‘공포’로 자리바꿈한 데에는 이러한 내력이 작용하고 있다. 응축된 한의 밀도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로 감지되는 것이다.”
16쪽 “유교에서 조상에게 올리는 제례의식은 죽은 뒤에도 영혼이 살아있다는 귀신 문화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를 존중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 근간을 둔다.”
19쪽 “귀신은 사후 세계, 즉 저승이라는 상상 속 공간에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동시에 오직 목격자에 의해서만 존재 증명이 가능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출현한 귀신은 귀신이 아닌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은 포획된 타자다.”
1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야담집에는 귀신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그 분량은 미미하다. 대개 야담집을 창작하고 읽고, 다시 편집하거나 전했던 이들이 사대부 남성이기 때문이다. 후기로 가면서 한글로 쓰인 야담집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주된 향유층은 여전히 한문을 읽고 쓰는 사대부 남성이었다. 공부하는 선비나 관리들이 여가에 읽던 심심풀이 독서물인 야담집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주인공이 사대부 남성, 벼슬하는 관리라는 점은 독자층과 텍스트 내용 사이의 상관성을 입증한다.”
19-20쪽 “이야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두 부류다. 하나는 현실의 불완전성을 해결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등장한 귀신이다. 다른 하나는 순탄한 죽음을 맞지 못한 원귀(冤鬼)다. 이야기 속에서 이들은 정확히 남자와 여자로 구분된다. 말하자면 무서운 원귀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성이 독점한 셈이다.”
20쪽 “그러나 성별을 막론하고 죽은 뒤에도 현실과 관계를 맺으며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은 이들의 공통점이다. 이유없이 등장하는 귀신이란 없는 것이다.”
20쪽 “귀신은 한의 증거인 동시에 의지와 욕망의 표상이다. 이들은 삶과 죽음, 현실과 사후 세계의 단절성을 해체한다. 동시에 그 경계에 위차한 인간의 욕망과 의지의 지점들을 포착해내는 타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22쪽 “여자 귀신들은 거의 대부분 남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22쪽 “남자 귀신 이야기가 여자 귀신 이야기에 비해 많은데도 더 오래 기억되고 널리 회자되는 것은 여자 귀신 이야기, 그중에서도 단연코 처녀귀신 이야기다. 그것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갖고 있는 독특한 ‘한’의 정서에 기인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여자들이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하는 입’을 갖게 되었고, 이야기는 바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확성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 처녀귀신 이야기가 귀신 이야기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상황적 요소, 억압된 것을 풀어주는 활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2~23쪽 “여자 귀신들이 사대부 관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은 사대부들이 귀신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23쪽 “남자 귀신이 조상신으로 영원히 기려지는 데 비해, 여자 귀신은 권력자가 억울함을 풀어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23쪽 “귀신의 성별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이유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간에 차이가 난다는 점은 귀신에 대한 상상력에 성별이라는 요소가 개입되었음을 뜻한다. 귀신담을 읽을 때 ‘젠더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24쪽 “귀신을 목격한 남성 관리들은 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줌으로써 귀신의 세계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귀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귀신을 완전히 추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억울함이 풀린 여자 귀신들은 영원히 현실에서 사라짐으로써 귀신으로서의 천수를 다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물러가라’는 관리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푼 여자 귀신들의 자발적 의사로 이뤄진다.”
24-25쪽 “누명을 벗은 여자 귀신들이 알아서 떠난다는 이야기의 흐름은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명관(名官)의 탁월성에 관한 이야기로 포장된다.
25쪽 “귀신의 등장으로 한때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던 현실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안전지대로 복구된다. 귀신 이야기가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교정을 요청하는 전복의 서사인 동시에, 현실의 복구를 강력히 희구하는 환원의 서사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
27쪽 “이야기 속의 자살자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나 선망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자살에는 ‘죽음관’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죽은 뒤에 전보다 더 나은 세계로 간다든지, 더 나은 조건으로 환생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자살은 철저히 현재의 삶에 대한 반응 형태로 나타난다. 삶에 대한 좌절과 저항, 그리고 도피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27~28쪽 “자살한 원귀들은 인간이 죽어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출몰은 가해자의 실패를 뜻한다. 가해자는 직간접적으로 이들을 현세 바깥으로 몰아냈으나, 이들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귀신이 되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귀의 등장만으로도 현실 제도나 질서, 원리나 이념이 전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원귀가 반사회적 존재로 읽히는 이유다.”
30쪽 (금오신화 관련) “귀신과 사귄 주인공들은 그후로 일상에 복귀하지 못한다”
30쪽 (금오신화 관련) “죽음보다 고통스런 삶을 견디기 위해 주인공이 택한 것은 귀신과의 사랑이다.”
30쪽 (금오신화 관련) “주인공이 만난 귀신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부른 거울 속의 분신,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환영’이다. 그의 동반자, 귀신은 산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텅 빈 공허의 대상이며 주인공의 고독에 상응하는 폭력을 경험한 존재다. 그들은 오직 환상 속에서 소통하고 현실로부터 고립된다.”
31쪽 (금오신화 관련) “『금오신화』의 처녀귀신은 남자 주인공의 도플갱어(Doppelganger)다. 도플갱어는 주인공의 또다른 분신으로 상대를 본 순간 자신이 죽는 비극적 운명을 지녔다. 『금오신화』의 주인공들이 여자 귀신의 정체를 애써 모른 척 하거나, 그 정체의 확인을 미루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대가 귀신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 자신이 죽는 것이다. 귀신이 정체를 밝힌 뒤 주인공이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것은 도플갱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보여준다.”
33쪽 “새하얀 처녀귀신의 복색은 한밤중에 타살된 흔적, 가족이 연루된 자살이라는 어둠의 정서와 대비된다. 소복은 여자가 잠잘 때 입는 속옷 차림, 무방비의 복색을 환기한다.”
33쪽 “처녀귀신의 소복은 입관과 매장의 장례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수의의 전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장이 아닌 매장 형식으로 신체를 보존하는 장례 문화를 택하는 한, 흰 옷은 사자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조선시대 장례 문화에는 삼베로 만든 수의 대신 화려한 채색 의상으로 수의를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흰색 수의가 일상화된 것은 근대 초기인 1910년대부터라고 한다.”->박태호, 『장례의 역사』, 서해문집, 2006, 145~148쪽.
34쪽 “처녀귀신의 하얀 소복은 곧 죽음의 얼굴, 억울함과 분노를 부각하기 위한 탈색된 배경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34~35쪽 “그런 의미에서 처녀귀신의 소복 차림은 죽음의 유니폼이라 할 수 있다. 길게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은 돌보지 않은 상처와 소외를 상징하며 처녀라는 신분은 응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에 대한 죄책감, 지켜야 할 성스러움에 대한 배반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소복은 차마 보호하지 못한 처녀의 신체와 내면, 어둠과 의혹을 부각하는 일종의 문화 기호다.”
41쪽 “18, 19세기 야담집에 등장하는 남자 귀신 이야기는 대부분 천수를 다하고 죽은 조상신을 다룬다. 이들에게서는 한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남자 귀신은 설령 그가 살해되어 귀신이 되었을지라도 법망을 벗어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귀신이 된다.”
41쪽 “남자 귀신에게서는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사대부 남성 스스로 불행한 최후를 상상하기조차 싫어했기 때문일까. 이야기가 거부한 것은 곧 현실화 맥락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판타지라는 상상의 공간에서조차 사대부의 몰락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41쪽 “이야기의 세계는 남자 귀신에게 조상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사후 새계에서의 권위를 부여해 놓았다. 이러한 남자 귀신의 힘이야말로 이들을 ‘남귀’가 아닌 ‘남신’으로 호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 ‘신(神)’을 ‘양(陽)’으로, ‘귀(鬼)’를 ‘음(陰)’으로 해석한 성리학자의 견해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남신(男神)’이고 ‘여귀(女鬼)’인 것이다.”
54~55쪽 (기문총화) “재미있는 점은 임광과 신경연이 죽어 명부의 관리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야기의 향유층은 저승에도 이승과 같은 행정체계가 있다고 상상한 것이다. 살아서 관직에 있던 사람은 죽어서도 관리가 되어 바쁘게 살아간다. 죽어서도 관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대부들의 스트레스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영원히 타인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57쪽 (기문총화) “누구도 바로잡지 못한 과거제의 폐단을 귀신이 처단했다고 한다, 귀신이 현실세계의 심판자, 모순의 해결자로 등장한 것이다. 귀신의 등장은 이유가 있을뿐더러 정당하고 의롭기까지 하다. 귀신은 현실 세계의 불안을 들여다보고 모순을 바로잡음으로써 현실에 깊이 관여한다. 이로써 남자 귀신이 현실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권한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66쪽 “말하자면 여자 귀신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머물 수 없는 난민이다. 그들은 오직 이야기하는 주체, 언어적 존재로서 신생(新生)한다.”
78쪽 (기문총화. 조현명 이야기에 붙여) “여인이 바란 것은 복수나 처벌이 아니라 명예회복이다. 조작된 과거를 되돌려 오해를 푸는 것이 그가 바란 전부였다. 여인의 소원은 10년의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고 드디어 그녀는 죽은 자의 영원한 처소, 저승에 갈 수 있게 된다.”
78쪽 “여인은 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나? 왜 번번히 실패하면서도 줄곧 관찰사를 찾았는가? 조선시대 여자 귀신들은 어째서 그다지도 합법적인 절차를 존중했는가?”
79쪽 (기문총화. 조현명 이야기에 붙여) “짧은 이야기 구조는 조현명의 유능함을 부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인의 참혹한 사현이나 선정적인 비극담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증거하는 소재가 되었다. 요컨대 이야기의 주인공은 살해당해 억울함을 품은 귀신이 아닌, 풍원군 조현명인 것이다.”
79쪽 “야담은 무슨 문제든 척척 해결하고,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의 소유자이며 지혜로운 판결자인 관리를 문화적 매개물로 삼아 사대부 남성 독자들이 자부심을 펼쳐낼 수 있게 한 것이다.”
80쪽 “여자 귀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된다면 현실에서 관리가 설 자리는 사라진다. 귀신에게 현실을 맡긴다는 위험한 발상이 조선시대 사대부 문학에 자리할 여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당사자들이 귀신을 ‘하소연하는 존재’로 설정하는 데서 그칠 뿐, 절대로 그들에게 ‘문제 해결의 권한’을 주지 않았다. 이야기 속 여자 귀신의 배후인 ‘현실’에서 이야기를 꾸며내 그를 조종한 이가 바로 사대부 남성이기 때문이다.”
89~90쪽 (장화홍련전 관련) “공포의 진원에는 가족사 비극이 가족 안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인 약자로서의 미성년자, 처녀, 전실 딸을 희생자로 삼는다는 문화적 합의가 자리해 있다. 바꾸어 말해 비극적 가정소설의 희생자가 전실 딸로 고정되어왔다는 것은, 가족의 약자는 가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미혼의 딸, 그를 보호할 친모가 없는 처녀라는 것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음을 뜻한다.”
144쪽 (남자에게 먼저 청혼한 여인들 관련 야담) “청혼이 성사되면 서술자는 스스로 남자를 골라 출세시킨 여자를 남다르게 뛰어나 흔하지 않은 존재, 탁월한 인물, 또는 잘 이해되자 않는 특이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이인(異人)’이라 칭했다. 이와 달리 청혼을 거절당한 여인들은 모두 자살을 택한다. 귀기 어린 저주를 남기거나, 원귀가 되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슬픔은 분노로 뒤바뀌며,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내어 앙갚음하는 복수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148쪽 “타인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한 자는 결코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다는 세간의 신념이 곧 그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논리이자 관습이었다. 그가 아무리 전도유망한 선비라 해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타인의 소청을 무시할 정도로 냉정하다면, 그에게 세상을 지배할 권한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시대적 합의가 ‘자살한 원혼의 저주’라는 문화적 힘으로 표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혼의 저주는, 공포의 기호로부터 문화적 건강성의 상징으로 자리바꿈한다. 원혼의 한이란 소재를 통해 문학은 사회적 건강성의 지표와 인간됨의 올곧은 방향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