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였다. 문학, 논술 수업을 담당하시던 학년주임 오정기 선생님이 갑자기 물어보셨다.
“홍길동전 아는 놈.”
전원이 손을 들었다. 홍길동전도 모르는 놈이 있나 하고 낄낄거리면서.
“홍길동전 읽은 놈.”
잠시 머뭇거리다가, 몇몇이 손을 내렸다. 선생님이 혀를 차셨다. 반장을 불러 세우셨다.
“홍길동전 그거 어떻게 끝나나.”
“붙잡혔던 홍길동이 병조판서 벼슬을 받고 율도국으로 가면서 끝나는데요.”
“그건 어린이용 동화책 이야기고. 그거 말고 다른 결론 아는 놈 손 들어봐라.”
다들 손을 내렸다. 나만 남았다.
“전혜진, 어떻게 끝나냐.”
“병조판서 벼슬을 받았던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서 요괴에게 붙잡인 두 처녀를 구해서 결혼을 하고, 홍판서가 죽자 그 시신을 율도국으로 모셔와 묻은 뒤 율도국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왕이 됩니다. 거기서 왕 노릇하고 오래오래 살다가 나중에 산에서 신선 도를 익혀서 승천하면서 끝나는데요.”
“여기 홍길동전 읽은 놈 쟤밖에 없다.”
그리고 학년주임 앞에서 잘난척 했다고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쥐어 터졌다. 설마 나는 한 클래스 52명중에 51명이 어린이용 홍길동만 읽었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젠장할.
그 한이라면 한은, 민음사 홍길동전을 읽으며 풀 수 있을까. 완판 36장본과 경판 24장본(요약판이랄까 문고판이랄까) 그리고 영인본 홍길동젼까지 종합선물세트로 실려 있다. 그러고 보니 홍길동전에서 정작 율도국을 세우고 이상국가를 만드는 과정은 싹 빠져있는 이유가, 홍길동의 혁명이 공산혁명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서라는 말도 그날 수업시간에 들었다. 아, 하지만 내게 있어 홍길동은, 그날 내 등짝을 걷어차던 놈들의 발길질로 기억나는 소설이다.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