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대 만화과 졸업 프로젝트 분반에 일본 출판만화 진출파트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 출신으로 일본 만화계에서도 명 편집자로 이름높으신 이현석님이 강의를 맡으신다고. SNS 여기저기서 기대가 크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이 상황이 참담하고 수치스러워서 죽겠다. 만화 스토리 일 놓은지 한참 되었는데도 그렇다.
일본 잡지만화와 한국 만화의 문법은 기본적인 레벨에서는 서로 호환된다. 그러니 번역서에 식자만 붙여도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철횡조인 한국만화와 우철종조인 일본만화는, 디테일한 단계에서는 시선의 흐름이나 처리, 대사를 치는 방식, 말풍선까지 서로 다르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만화는, 그 중에서도 순정만화는, 적어도 최상위권의 작품들은 일본 만화에 견주어 밀리지 않는 발전을 이루고 예술성을 갖추었다.
다른 훌륭하신 작가님들 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그림 못 그리고 소설을 쓰던 나 하나만 보자. 나는 이슈노벨 공모전으로 당선되었다. 애초에 시작이 소설이었지만, 당선된 매체가 대원씨아이 이슈, 만화잡지였다. 그리고 여기의 손현주 팀장님은 얼마나 알뜰하신 분인지, 내가 추리나 스릴러나 SF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견적이 나오자 곧 내게 콘티 훈련을 시키셨다.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스토리를 짜고 콘티를 그려서 보냈는데 “몇 페이지 큰 컷을 30도 위에서 본 각도로 다시 그려라”같은 소리가 문자메시지로 올 정도였다. “미쳤냐고요!!!! 난 소설인데!!!!!” 울부짖었지만 혹독하게 시달린 결과물은 좋았다. 얼마전 “레이디 디텍티브”와 “리베르떼”를 다시 읽어보면서 느꼈는데, 대사는 다소 예스러울지언정 이 두 만화의 연출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만화의 문법을 제대로 따른 것이었다. 신인작가 두 사람이 만들어낸 만화로는, 제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만큼이나 잡지에서, (심지어 글만 쓸 줄 알지 그림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던) 작가를 한 사람의 스토리작가로 제대로 훈련시켰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근데 뭐, 그 황금기를 이루었던 잡지들은 싸그리 망했고, 그때의 편집자님들은 사라지거나 웹툰계로 가셨으며, 한 사람이 대여섯편 맡던 것을 수십편을 맡게 되며 그런 디테일한 훈련은 사라졌다. 작가는 처음에는 맨땅에 헤딩했고, 자기 재능으로, 아니면 대학 커리큘럼을 통해서 훈련받았다. 잡지로 데뷔했던 분들은 한 주에 70컷, 완급을 조절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컷을 일러스트 급으로 뽑아내야 하는 웹툰의 생태계에 갈려나갔고.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웹툰의 연출이 상대적으로 출판만화에 비해 단선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출판만화는 시선의 흐름이 세로로도, 옆 페이지로도 넘어갈 수 있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며 의도적 분절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스크롤 연출은 다르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 분절이나 세세한 시간 처리를 하거나, 동시에 여러 상황이 흘러가며 독자가 느리게 읽거나 돌아가며 읽게 하거나, 점프 컷으로 동시다발적인 연출을 하기에, 출판만화에 비해 부족한 면이 있다. 소설이나 쓰고 있는 님이 뭘 알아서 그래, 라고 말한다면 나도 웹툰도 세 편, 연출했다는 이야기도 해 두겠다. 그중 각색물인 두 편은 순조롭게 수출도 되었고. (나름 잘 되었지만 이 두 편은 원작이 있기 때문에 내 연출이지 내 스토리라고는 하지 않겠다. 어쨌든.)
여기서 옛날 인터뷰를 하나 찾아보자 https://cine21.com/news/view/?mag_id=35225
“업체에서는 스크롤 방식도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괜찮다’와 ‘보기좋다’는 다르거든요. 작가가 읽는 속도를 제압하지 못하고 스크롤로 보는 인터넷 만화는 마치 비디오를 서치로 돌려 대충 보는 것과 같아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면이 다르면 연출도 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면의 세로연출을 인터넷의 가로연출로 재편집하는 데에 3일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보람은 있습니다. 다른 해석도 들어갈 수 있고요. 휴대폰으로 보는 만화도 있는데 그건 또 영화의 그림콘티 같은 개념이더군요. 왜 이리 배울 것이 많은지, 재미있습니다.”
2005년 12월, 씨네21에 올라온 김진 선생님 인터뷰다. 이 무렵 김진 선생님은 웹진 We6에서, 모니터 가로세로 비율에 맞춘 형태의 웹툰 연출을 연구하고 계셨다. 그 “바람의 나라”로. 작가가 읽는 속도를 통제하거나, 출판만화에서의 연출을 웹에서 표현하기 위해. ( https://jeonheyjin.com/2025/02/19/27419/ )
“일부러 통제하지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도록 글이 이중으로 나가기도 해요. 만화가 영화나 소설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한컷에서 대화가 중첩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상대의 대사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죠. A가 말을 할 때 B가 받아치면서 두 캐릭터의 생각을 옆에 동시에 쓸 수 있고 거기다 비난하는 캐릭터인 C가 저쪽에서 말을 하면서 작가의 내레이션까지 들어가면 여섯개의 이야기가 흐를 수 있죠. 그쯤 되면 굉장한 고급 독서에 속하는데 사람들은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걸 잘 몰라요.”
어쨌든 이런 노력이나 연구와 별개로 세로 스크롤은 업계의 대세가 되었는데, 내가 아쉬운 건 가로-페이지 형태의 웹툰 연출에 대해서, 평론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야기하면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다. 대체 이 시계열과 시선 흐름과 공간연출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가 없을 리가 없지 않았나?
지금 내 책상에서 고개를 들면 책꽂이에는 우라사와 나오키라든가, 마시리토 최강 만화술이라든가, 그런 책들이 꽂혀 있다. 일본 만화 분석한 책들도, 작가를 기록한 책들도. 유튜브에서는 모리 카오루가 작업하는 것을 그대로 카메라를 고정해 기록해 둔 듯한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난 그런 것을 볼 때 마다, 주변에 평론이나 만화 연구 한다는 사람 지나갈 때 마다 말했다. 기록해야 해요. 작가가 아직 현역일 때, 출판만화 편집자들이 아직 현역일 때. 김진 선생님 강경옥 선생님 신일숙 선생님 김혜린 선생님이 다 환갑이 넘으셨는데, 이분들 현역일 때 작업하는 거 영상으로 기록한 거 하나라도 있어요? 지금 웹툰 작가의 인터뷰를 따는 것보다, 윙크나 이슈의 기자님들에게 잡지만화에 대한 기사나 노하우를 모으는 게 더 급한 것은 아닐까요? 물었지만 늘 답은 없었고, 웹툰에 밀린 출판만화는 지난 세기의 유물처럼 예산이나 관심사에서 밀려나는 게 보였고, 그 와중에도 순정만화는 더욱 변두리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2010년 이후 순정만화에 대해서는 연구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임주연 선생님의 “대답하세요 프라임 미니스터”가 끝났는데. 과연 임주연 선생님의 다음 작품도 출판만화 형태일 수 있을까 싶어서 고통스러웠다.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그렇게 우리가, 거의 세계 정상에 가까울 만큼의 노하우를 쌓았고 실적이 있었던 것들을 20년동안 내팽개쳤다가, 이제와서 일본 출판만화 강의 들어온다니까 좋아하고 있어? 다들 자존심도 없냐? 솔직히 출판만화 출신 웹툰 작가나! 출판만화 편집자 출신 PD나! 출판만화 시절에 평론 시작한 평론가들은 이 상황에, 지금 시작하는 세대 앞에서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어야 하는 것 아니야? 우리가 그냥 흘려버려서, 소중히 여기지 못해서, 기록을 안 해 놓아서, 산업이 쌩으로 말라죽어가는 와중에에도 노하우조차 남겨놓지 못해서! 그래서 지금 스무살 짜리들에게 한국 출판만화가 아니라 일본 출판만화 강의를 들려줘야 한다는 게? 나는 내가 소설쓰는 사람이고, 만화는 스토리만 발 담갔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러워 죽겠는데! 쪽들도 안 팔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출판만화 할 줄 아는데 웹툰도 하고 있는 작가 중에, 이 상황에 요만큼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은 스튜디오 캐러맬 정도라고 생각한다. 출판만화 연출 노하우 기록해서 책까지 펴내셨으니까.)
아니, 말을 험악하게 써서 그렇지, 이현석님께서 강의하신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야말로 다 말라죽어가는 땅에 다시 물 대러 오신 것이지. 한국 출판만화 산업이 다 죽었어도, 재능있는 사람들은 일본에서라도 다시 그 문법으로, 그 연출로, 또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국만화의 문법이 아니고, 한국만화의 이야기가 아닐 뿐이지. 근데 뭐. 어쩌겠어? 돈 안 된다고 하나도 안 남겼는데, 메마른 땅에서 씨앗들이 다 말라죽기보다는 옆집에서라도 꽃 피우면 다행이지, 다행. 다행인데, 나는 우리가 미안한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잡지를 작가가 죽이진 않았지. 잡지를 평론가가 죽이지도 않았고. 근데, 이 씨앗들에게 남겨줄 이론서 하나 멀쩡하지 않은 건! 거장들 작업하는 걸 기록하는 게 아니라 출판만화 거장들에게 “거장전”이랍시고 단편 웹툰이나 그리게 하던 건! 대학이 연구보다는 대학만화 최강자전에나 목을 매던 건!
수치스러운 거 하나 모르는 놈들은 전부!!!!!! 어디가서 남의 선생이라고 고개 쳐들지도 말아!!!!!! 먼저(先) 살아온(生) 주제에 기록할 생각조차 안 하고, 일본만화래 와아~ 하고 있으면 그게 무슨 선생이라고!!!!!!!
그래, 다행히도 순정만화잡지가 다 죽은 건 아니다. 파티 하나 남아 있지. 그럼 파티 편집부에 쫓아가서 읍소라도 해서, 기록을 해요. 출판만화와 웹툰은 어떻게 다른지, 매우 비슷하지만 디테일하게는 달라지는 한국만화와 일본만화의 문법은 어떻게 다른지, 작가는 어떻게 키우는지. 대학이라면…… 연구기관인데. 아카이브를 해야 할 거 아냐. 지금 연구를 못 할 것 같으면 후대에 자료라도 남겨줘야 할 거 아니냐고. 그걸 안 하면 학원보다 나을 게 뭔데.
그리고 남아있는 출판만화 작가님들을 좀 소중히 여겨 보라고. 그분들이 완결 내실 수 있게, 그때까지 매체가 살아있게. 가급적이면 다시 싹을 틔울 수도 있게. 이 모든 것이 그냥 미싱 링크로 남지 않도록.
PS2) 아아.
오늘 오후에만 해도, 침착한 시선과 차분한 말투를 갖춘 우아한 중견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추구미)
대체 마음먹고 몇시간이나 지났다고 또 “이 시발새끼들이”하면서 키보드를 두들겨 패며 험악한 소리들을 쏟아낸 것이냐…….
…….아니, 근데요. 선생이라는 말은 먼저 선(先)에 살 생(生) 자 쓰는 말이라고요. 먼저 살았으면 사람이, 다음 세대에 남겨줄 것도 생각은 해야 하잖아. 물론 우리 안의 오타쿠 자아야 그럴 수도 있어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을 못 물려주고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우왕 일본만화당” 할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