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스승의 아들은 집을 나가 몇 년째 돌아오지 않고, 늙은 스승은 자신의 이름을 제자에게 습명하겠다고 선언하며 제자를 불러 말한다. 가부키 세계에서 부모가 없다는 것은 목숨이 없다는 것과 같지만 너는 재능으로 살아가라고. 제자는 스승과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품은 채 습명식에 임하고, 그 자리에서 스승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정신을 잃어가는 스승이 부르는 것은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아들, 슌스케의 이름이다. 그 모습을 보는 제자, 키쿠오는 쓰러진 스승을 향해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노년의 인간국보 만기쿠의 표정은, 마치 키쿠오가 스승의 아들인 슌스케가 응당 물려받아야 할 것을 빼앗으려 했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듯이 준열하다.

사실 아버지가 죽거나 아버지와의 인연이 끊어진 뒤, 뛰어난 스승이 거두어서 자신의 아들과 경쟁시키며 가르쳤는데, 거둬들인 제자 쪽이 스승의 아들보다 더 뛰어나서 생기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흔하다. “3월의 라이온”에서 코다 집안과 키리야마 레이의 관계도 그렇고, 허영만의 “식객”에서도, 또 드라마 “동의보감”도 부분적으로 그렇다. 물론 유의태가 허준을 적극적으로 거두어 가르친 건 아니지만, 일단 허준과 유도지의 갈등 구조가 그렇다. 흔한 이야기여서 특별할 것 까진 아닌데, 구조적으로 혈연으로 세습하는 게 이 시대까지 당연한, 그래서 제자가 스승의 아들보다 뛰어난 것이 반역처럼 간주되고,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주역을 맡고, 누구는 조역만 맡는다는 세계 자체가 흔하지 않으니까. (만화 “꽃보다도 꽃처럼”은 주인공이 노가쿠를 하는 집안 출신인데, 여기서도 주역을 맡은 가문과 조역을 맡는 가문이 따로 나뉜다.) 전에 넷플릭스에서, 쟈니즈 출신 배우가 창작 가부키를 하는 다큐멘터리 “이쿠타 토마의 도전”를 보다가 문득, 가부키라는 예술에 대해 저 배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그에게 가부키를 지도하는, 주역 가문 출신이 아닌 배우들일텐데 왜 창작 가부키에서도 그들은 당연하게 주역이 되지 못하나, 배우 이쿠타 토마가 가부키를 빠르게 습득하는 것과 별개로,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주역을 못 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런 생각에 계속 찝찝해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화면이 무척 아름다운데, 아름다우면서도 가부키 가문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결정적인 순간에 밀려나는 그 시스템 자체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라 치가 떨릴 정도였다.

보는 내내 슌스케의 물정 모르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을 긁었는데, 뭔가 본격적으로 사람 속을 헤집는 그런 것은 아니고, 매 대사마다 천진난만하고, 도련님스럽게 악의는 없는데 그에 비례해서 눈치도 없고, 몇몇 장면은 어리광을 부리다 못해 대가리가 꽃밭같았다. 후반부에 슌스케는 다리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다가 당뇨로 발이 괴사되었음이 확인되어 잘라내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도 당뇨에 안 좋을 바나나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장면을 보면서(이 영화에서 누가 바나나를 먹는 장면은 딱 한 장면, 이 장면에만 나온다), 저 순간에도 자기연민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구나. 이러니까 샤아 아즈나블이 가르마 자비를 싫어했지. 애송이라서, 또는 애비를 잘 만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인생에서 중요한 공연은 두사람이 함께 한 첫 무대이자 슌스케와 키쿠오가 모두 돌아온 뒤 함께 공연했던 “도죠지의 두 사람”, 그리고 키쿠오가 스승을 대신해서 무대에 올랐고, 다리를 절단한 슌스케가 키쿠오와 함께 무대에 섰던 “소네자키 동반 자살”. 이 네 번의 공연 중 행복한 것은 첫 번째의 도죠지의 두 사람 뿐. 키쿠오의 “소네자키 동반 자살”을 보고 슌스케는 집을 나갔고, 두 번째의 “도죠지” 직후 슌스케가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번째의 “소네자키”에서 키쿠오는 슌스케의 재발과 죽음을 예감한다. “소네자키”는 키쿠오와 슌스케의 가부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무대인데, “소네자키”에서 오하츠는 토쿠베이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함께 죽겠다고 말하고, 토쿠베이는 그 발을 마치 칼날인듯 목에 들이댄다. 젊었던 키쿠오도, 한쪽 발을 잃은 슌스케도 저마다 오하츠가 되어 가부키에 대한 목숨을 건 사랑을 고백하듯이 토쿠베이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스승을 대신하는 두려움과 함께 관능이 느껴지던 키쿠오와 달리, 같은 장면을 연기하는 슌스케의 발은, 이미 괴사가 시작되어 있다. 너무 늦었다는 듯이.

사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에서 슌스케가 아이를 잃은 어머니 역할을 한다. 슌스케는 집을 떠났을 때 첫째 아이를 유아 돌연사로 잃었다. 근데 젊은 아버지가 자식을 안고 병원으로 달렸지만 아이가 품 안에서 죽는 그 슬픈 장면에서, 슌스케는 “이 아이는 탄바야의 소중한 후계자란 말이야!”하고 외치며 병원으로 뛰어들어간다. (……) 뭔가 주변 사람들이 할 말이 굉장히 많아지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예의상 참았을 것 같은 장면……

키쿠오는 자신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피가 없다고, 그래서 슌스케를 향해 네 피를 마시고 싶을 정도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원래 “야쿠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배우가 아니라 야쿠자가 되었을지 모르는. 원작에서 그의 사생아 딸은 유명 가부키 배우를 아버지로 둔 신붓감으로서 “스모 집안의 안주인”이 된다. 그는 자신의 딸을 낳은 게이샤나, 스낵바에서 일하던 소꿉친구가 아닌 이 혈연으로 이어진 세계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누군가의 딸”인 아키코를 유혹해서 결혼한다. 그는 혈연으로 수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계 때문에 고통받지만, 그 역시도 혈연으로 수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계에서 혈연을 가진 기득권이다. 소설 쪽은 딸을 스모 선수와 결혼하게 함으로써 이 층위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보여준다. 하지만 가부키 배우에게 중요한 건 “아들”인 후계자인데, 키쿠오는 본인 홀로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결국 아들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다. 혈통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서 피어난 뿌리 잘린 꽃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가부키 배우에게 중요한 게 자신의 혈통과 대를 이을 아들이라고 해도, 영화도 원작도 이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도 아니다. 스승인 하나이 한지로의 아들인 슌스케는 제멋대로 도망쳤고, 이 과정에서 키쿠오를 사랑했던 하루에와 결혼했다. 슌스케의 장남은 갓난아기 때 죽었다. 영화는 슌스케와 하루에 부부가 둘째아들과 함께 돌아와 가부키 명가의 적통 자손이라고, TV에 나와서 마치 진정한 예인의 길을 걷기 위해 방황했던 시간인 것 처럼 포장하는 장면들을 TV 화면 너머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그런 매스컴의 호들갑에 놀아날 것 같은 진지하지 못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TV를 보며 어쩜, 하고 감탄하는 장면들을 일부러 집어넣는다. 사람이 죽고 두들겨 맞는 장면조차도 한없이 아름답게 잡아내던 화면이 순식간에 톤이 바뀐다. 어떤 면에서는 “가부키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너희가 TV를 보면서 명문가의 자손이니 습명이니 그런 걸 보면 환장하고, 재능과 성실함으로 묵묵히 일해온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악역 취급하지 않느냐.”는 비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원작에서 슌스케의 아들은 가부키 명가의 아들로 역시 가부키 배우가 되지만 키쿠오의 눈에는 그다지 성실하지도 않고, 나중에는 뺑소니 사고를 내고 도망쳐 키쿠오가 기자회견에서 사죄하게 만든다. 실제로 일본 가부키 집안의 사건사고들을 찾아보면 더한 것도 있으니 원작이나 영화나 많이 순화하고 당의정을 두껍게 입힌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비판은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에서 한 번, 다시 이상일의 영화를 통해 한 번, 아름다운 장면들 사이에 가시처럼 튀어나와 있다.

키쿠오의 등에 문신한 수리부엉이는 은혜를 갚는 동물이라고 나오는데, 그는 스승을 능가하고 인간국보가 되었으니 스승에 대한 은혜는 충분히 갚았겠지만,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를 뒷바라지하러 오사카까지 함께 온 하루에도, 딸을 낳아 준 후지코마도, 아내인 아키코에게도(근데 이쪽도 가부키 명가의 딸인데, 얘는 키쿠오에 대한 사랑으로 집을 나오긴 하지만 슌스케같은 대가리 꽃밭이 아니라 키쿠오가 고생하던 시절에 매니저 노릇을 제대로 한다. 그런데도 키쿠오가 돌아온 뒤에는 정말 대사 한 마디 안 나오고 사라진다.). 그런데 애초에 그는 사모는 물론 자신의 어머니(의붓어머니)에게도 딱히 도리를 다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스승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인간국보가 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그의 눈에는 가부키 세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눈보라가 보일 뿐 사람은 반투명하게 보였을 것 같다. 슌스케조차도. 슌스케가 죽은 뒤에는, 그의 눈에는 세상이 거의 투명하고 무대 위의 세계만이 진실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슌스케와 스승의 추모 공연을 앞두고 인간국보가 된 키쿠오가 인터뷰를 하는 표정은, 마치 “3월의 라이온”에서 소야 토지처럼,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소야 토지는 격이 다른 천재 이전에 내성적인 사람으로 할머니나 가까운 몇몇 지인들과는 나쁘지 않게 지낸다. 소야 토지에게서 눈 내리는 풍경이나 맑은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풍경을 보는 키리야마는, 그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고. 연출은 비슷한데 결은 다르다.) 그는 고독하고, 설령 그의 주변에 아내와 제자들, 다른 배우들 등이 가득하더라도 그의 눈에는 그들이 유령처럼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흰색과 붉은 색, 삶과 죽음이다. 야쿠자 아버지가 죽을 때 눈 덮인 정원에 흩뿌려지던 붉은 피, 새하얀 화장 위로 눈꼬리와 입술을 붉게 칠하는 가부키의 화장,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무대 위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스승 하나이 한지로와, 키쿠오가 무대 위에서 보는 눈보라의 환상. 그리고 눈밭에 뿌려지던 피로 시작한 이야기는, 마침내 눈보라의 환상 속에서 공연하는 백로 아가씨 아코야로 막을 내린다. 키쿠오가 눈보라의 환상을 보는 장면들에는 “스완”에서 세르쥬 라블로프스키가 환상 속에서 여전히 마스미의 어머니와 춤추고 있는 장면이나, “3월의 라이온”에서 키리야마가 소야 토지와 쇼기를 두던 시퀀스 생각이 났는데, 눈보라의 환상은 그의 재능이 닿은 어떤 경지, 지향점, 그리고 일종의 광기와 닿아 있다. 아마도 그 광기를 보는 사람이 만기쿠였을 것이다. 온나가타로 인간국보가 된 “아름다운 괴물”. 평생 아름다움을 추구해 온 그 노인은 가부키 계의 전통을 따라 탄바야의 후계자가 될 슌스케의 무대 복귀를 도우면서도, 슌스케에게 말하듯 키쿠오에게 말한다. 가부키가 지긋지긋해도, 그래도 무대에 오르라고. 키쿠오는 그 말대로 계속 무대에 선다. 아무리 초라한 무대라도, 관객이 무대에 올라와 자신을 희롱할 지경이 되어도. 마지막의 백로 아가씨 무대에서 키쿠오는 환상 속의 눈보라를 바라보며 “정말로 아름답구나.”하고 중얼거리는데, 이 장면에서는 “파우스트”의 “순간이여, 멈춰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했고, 키쿠오도 신사 앞에서 자신은 악마와 계약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지. (으쓱) 어쨌든 혈연으로 이어지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작품 내부에서의 비판과, 가부키 세계의 여성관에 대한 묘사, 그리고 마지막에 딸이 하는 대사 너머로 투명도 30%로 보이는 감독의 남성 자아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또 다른 레이어에서, 이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스승의 죽음, 인간국보 만기쿠의 죽음, 도죠지의 두 사람에서처럼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인듯 움직였던 슌스케의 죽음을 넘어 키쿠오가 그 자체로서 예술이 되어 승화하는 과정을 다루면서, 계속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는 언젠가 죽을 자리를 고를 수 있다면 지금 여기 이 무대에서/책상 앞에서/흙반죽 앞에서/붓을 쥔 채로, 죽고 싶다는 열띤 생각을 해본 사람의 어떤 것들이 인상적으로 담겨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한참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와 별개로 게이샤인 후지코마는 첫 만남 말고는 딸과 함께 있는 모습만, 아키코는 키쿠오가 가부키계에서 떠나 방랑하며 무대에 오르는 동안 고생하는 모습만 나온다. 딸의 경우는 원작과 많이 달라졌지만, 딸과의 구질구질할 정도의 갈등과 화해를 전부 화면에 담기에는 역시 역시 어릴때 영광의 순간에 아빠 아빠 하고 따라오는 것을 외면했던 딸이 성장해서 마지막에 어떤 형태로든 예술가가 되어(포토그래퍼) 나타나 내 엄마를 기억하냐면서 나타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무대는 아름다웠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쪽이 화면상으로는 나았겠지. 하지만 고생은 여자에게 다 시키고 영광의 자리에는 남자만 서는 세계 같은 게 21세기에도 계속 “아름답구나” 로 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일지. (……그리고 그 딸을 키운 것은 슌스케와 결혼한 하루에다. 본가의 안주인으로서 집안 아이를 거두어준 그런 느낌이었겠지.)

PS) 그런 점에서 “가극소녀”가 조금 흥미로운게, 가부키 집안 여자가, 누군가는 전통을 따라 경영자 노릇을 하고, 누군가는 무용 유파를 잇지만, 누군가는 가부키와 상관없는 사업을 하고, 가부키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생아는 다카라즈카에 들어가 버린다. 그래봐야 이 만화도 재능이 혈연을 따라가지만.

PS2) 포스터나 예고편만 보면 키쿠오와 슌스케가 끈적한 애증관계일 것 같지만 그런 것 전혀 없고요. 왕의 남자나 패왕별희하고 아주 다른데, 패왕별희 생각난 장면이 딱 한 장면 있었다. 스승님이 키쿠오에게 소네자키 동반자살 연습시키는 장면에서, 패왕별희에서 데이가 어릴 때 스승님께 맞으면서 “나는 본래 계집아이인데” 하던 장면 생각났음.

PS3) 상영시간 3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흔히 화장실 갈 걱정을 하던데, 그건 직전에 커피 등을 마시지 않으면 크게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 시간동안 영화를 보면 막판에 허리가 아플 수도 있다. 나도 이런 식으로 알고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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