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키퍼의 문구는 구경은 했지만 써보지 않았다. 약간 내 감각과는 맞지 않아서. 물론 예쁜 문구들, 이라고 분류할 만한 물건 중에 사무용 물건인데 팬시하고 감각적인 것들은 주로 젊은 층의 감각을 바탕으로 만들다 보니,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맞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도 초등학교 앞의 오래된 문구점에서 신기하고 잡다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사오는 취미가 있다 보니, 그런 이야기일까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면 기대했던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고. 문구 사진들은 예뻤다. 예쁘고 빈티지한, 세계 여러 곳의 문구들. 외국에 가서 골목에 있는 작은 문구점까지는 못 가더라도, 마트나 하다못해 편의점에라도 들러서 그곳에서 파는 볼펜이나 연필 같은 것들을 사들고 오는 나의 소소한 취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예쁜 문구들 사진과 문구들에 대한 짧은 리뷰들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다가, 본문을 읽으면서 복잡한 마음이 든다. 처음부터 문구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아끼고 모아서 큰 마음 먹고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의 항공권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두 달이 넘게 파리와 베를린, 바르셀로나, 런던, 뉴욕 등을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아날로그 문구나 빈티지 문구들을 사들이고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며 “문방구 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재발견…… 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한두 군데도 아니고 두 달동안의 여행을, “나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다니. 꿈이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그랜드 투어까지 다녀와야 찾을 수 있는 거였나. 그런 거창한 여행을 다녀온 것 치고는 유럽 스럽거나 빈티지한 느낌이 강한 디자인은 아닌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험이겠지만 그게 다인가. 지금 아직 학교도 졸업 못하고, 아니면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고도, 자기가 그린 그림과 디자인한 문구들로 승부 보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자기만의 문구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서 앞서 간 사람의 경험담을 읽어보려고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본격적인 디자인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일단 자기 자신과 꿈과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난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에 스타벅스 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모르겠다. 아니, 왜 그런 말들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무슨 거창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 용기를 내기 위해” 유럽 문구점 여행부터 훌쩍 떠날 수 있는 이야기를 읽고 무슨 생각이 들까 잠깐 생각했다. 하긴, 예전에는 집 나간 자아를 찾으러 인도에 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유행했었지.
예쁜 책이고, 몇몇 도판들은 예뻐서 한참 들여다보았고, 저자가 아름답고 감각적인 것들을 골라내고 배치하는 감각이 뛰어난 것은 알겠지만. 왜 내가 그렇게 문구들을 좋아하면서도 해당 브랜드의 문구들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진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타쿠라서 그런지, 자신의 취향을 관철하기 위해 세상 전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그런 게 좋다. “제가 이런 것을 좋아해도 될까요?” 정도의 기백으로는 취향에 맞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설득할 힘은 부족하다. 실용적인 정보로서, 고무줄과 클리어 파일을 가져가면 좋다, 는 대목은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브랜딩의 첫 걸음은 나는 이것으로 너를 설득하겠다, 라고 생각한다. 무슨 탄압받는 취미도 아니고 문구에 대해서, 고작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 힘내고 용기를 내야 하는” 정도의 어리광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영 설득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업종으로는 흑심처럼, 연필이라는 한가지에 사로잡혀서 그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아놓았다, 나는 이렇게 연필을 사랑한다, 그런 오타쿠의 기백 같은 것 말이다. 사진과 리뷰들에서 좋은 감각을 느꼈는데, 좀 더 자아가 확고했다면 더 설득력있고 독창적인 게 나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