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창가의 토토” 애니메이션을 보고, 새로 번역된 책을 다시 읽고, 그리고 ‘그 후 이야기’도 읽었다. 읽으면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몇 번인가 떠올렸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일단 첫 문장부터 그랬다.
“내일부터 매일 아침 바나나를 먹을 거야!”
구로야나기 테츠코 기준의 옛날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바나나는 고급 과일이었다. 그런 것을 전쟁이 본격적으로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기 전에, 바나나가 몸에 좋다는 말만 듣고서 그렇게 결정하는 이야기와, 어린 토토가 아빠와 함께 긴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장난감을 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었을 때의,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지고 아버지인 모리 오가이는 전쟁터로 떠나기 전의 화려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생활에 대해 읽을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불쾌함이 죽 올라왔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쟁 중 피란 생활과, 이후 음악 학교에 진학했다가 NHK 소속 방송인이 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고, 아버지가 군대에 끌려가고 남동생은 죽고, 남은 가족들은 가족들은 아오모리에서 피란 생활을 하는 시기의 이야기는 안타까웠다. 이 책에서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그 전쟁이라는 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었고, 우리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긴 했지만, 어쨌든 그 전쟁은 당시 열 살 남짓 하던 어린아이들의 책임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이전의 풍요롭던 생활에 대한 묘사를 보다 보면, 그 시절에 어머니도 음악 학교를 졸업했던 중산층 지식인 부부였던 그 부모에게는, 이 전쟁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고만다. 물론 모리 마리의 책을 읽을 때는 그 부친은 당시 일본군 장성이자 문호였던 모리 오가이였으니까 더 노골적으로 빈정거리게 되는데, 토토의 아버지는 NHK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면서도 군가는 연주하지 않으려 하는 등 나름대로 전쟁에 반대하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이 본격적으로 확전되기 전, 토토 가족은 기차로 아오모리 근처를 지나다가 이곳의 농부와 알게 되어 사과를 주문해 먹고 있었다. 도모에 학교가 폭격으로 문을 닫고, 토토와 가족들은 시골로 피란을 가려고 한다. 하지만 살 곳을 구해놓고 돌아와보니 아버지에게 입영 통지가 날아와 있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전선으로 끌려가 포로가 되고, 가족들은 아오모리로 향한다. 사과로 인연을 맺었던 농가의 도움을 받아 하루를 나고, 살 집을 구하고, 어머니는 사무직으로 일하는 한편 결혼식 축가 등을 부르며 아이들을 키운다. 어머니는 공습으로 집을 잃은 친척들을 아오모리로 불러들이고,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 어머니도 이곳으로 모셔온다. 그리고 일하면서 배급 받은 쌀을 들고 다니면서 밥을 지을 곳을 찾지 못해 쩔쩔 매는 남자들을 보고 밥에 된장찌개와 생선구이를 곁들인 정식 장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토토네 가족은 아오모리 대공습은 면했지만, 도쿄의 집이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쟁이 끝나고 토토의 어머니는 도쿄에서 물건을 떼어다 팔며 도쿄에 집을 다시 지을 돈을 모은다. 토토는 도쿄로 진학을 하고, 1949년에는 아버지도 돌아온다. 전쟁 막판에 5, 6년 정도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읽으면서 자꾸 같은 시기의 한국인들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음악 학교에 진학하고, 방송인이 되는 과정을 읽는 동안에는 마음이 좀 복잡했는데, 면접에 와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선발할 수 있는가 부터 시작해서, 어리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철이 없고 곱게 자란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어쩌면 이 “곱게 자란” 면과 구로야나기라는 성을 보고 가산점이 붙었던 건 아니고? 일단 뽑아놓고 그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큰 일을 맡기고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상식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시험에서 선발하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 시절의 감각으로야 천진난만한 야생의 소녀(이지만 곱게 자란)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취업난을 겪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낙하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만한 이야기는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근데 일본 여성들의 수필을 읽다 보면 자신을 그런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종종 봤어서, 어떤 것일지 궁금해 지기도 하고. 그런 것도 일종의 모에화…… 겠지. 대체 왜? 설마 “바쿠만”에서 말하는 것 처럼, 일본에서는 아직도 “너무 똑똑한 여자는 귀엽지 않으니까”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도짓코로 보이려는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