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천 – 이매자, 문학세계사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한국전쟁을 전후로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이 첩을 들이게 된 여성, 그리고 이들 두 여성이 한국전쟁을 겪는 이야기라고 이해했고, 이런 부분이 흥미롭겠구나 하고 미리 짐작도 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중에 남편은 전쟁터에 끌려가거나 전사하고 두 여성이 서로 의지하는 자매애라든가. 위 문장만 봤을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런 내용일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꽤 다른 이야기였다. 추천사에 “복합적이면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러브 스토리”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 추천사를 쓴 사람이 미국인인 것을 보고 흐린눈을 하고 생각했다. 아, 너희가 생각하는 “오리엔탈” 그런 거. 이 책을 구입하고 읽기 전 읽었던 모든 텍스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맞는 말은 박상화 시인이 쓴 “똑똑한 여성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던 습속의 포승줄에 묶여 괴로워야 했던 인간의 이야기”라는 말인데 사실 이 말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여성 서사에는 아무데나 갖다붙여도 90%는 들어맞는 이야기니까 넘어가자. 여튼 기대와는 많이, 매우 많이 다른 이야기였다.

작가가 어느정도 자전적으로 쓴 이야기라고 들어서 웬만하면 나쁘지 않게 말하고 싶긴 한데, 작가는 작가고 일단 작품 속에 묘사된 인물은 현실의 인물과 동치되는 존재는 아니다. 일단 이 이야기에서 최악의 인물은 음천의 남편인 귀용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음천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된 채로 업둥이로 들어온 갓난아기 미나를 친딸처럼 호적에 올려 키우고 있었다. 음천의 남편인 귀용은 아내인 음천을 사랑하고 속궁합도 잘 맞지만(이들의 속궁합에 대해서는 용의 춤이니 어쩌고 하면서 계속 나오는데,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섹스를 용의 춤이라고 비유하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건 “용틀임”을 영어로 풀어 쓴 것을 한국어로 직역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고.) 아내인 음천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소박맞은 여자인 수양을 첩으로 들여 아들을 낳으려 한다. 귀용은 그렇게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남자도 아니고, 그냥 대단하지 않은 보통 남자인데도 아들이 없으니 첩을 들여야 한다는 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어머니가 손주를 원한다는 핑계가 따르지만, 본인이 수양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상 이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본인 희망으로 된 일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새 여자도 좋지만, 그래도 음천은 여전히 자신에게 일편단심 지고지순이어야 한다”는 매우 자기본위적인 생각만 하고 있다. 이 남자의 이기적인 행각 중 최악은 역시, 첩인 수양을 들여 놓고 초야를 치르려다가, 본처인 음천이 속상해하는 표정을 보더니 수양과의 초야에 음천까지 불러들여 셋이 한 방에 눕는 장면인데, 눈치보며 “들여져서” 초야도 제대로 못 치른 첩 수양은 물론이고, 남편과 첩의 초야에 그 옆에서 불편하게 자야 하는 음천이 홧병으로 쓰러져 자리보전을 하는 것까지, 이 장면들의 모든 것이 끔찍했다. 사실 끔찍한 시대였고, 여성들이 끔찍한 대접을 받은 것도 맞으나, 그럼에도 귀용은 계속 우유부단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 묘사되고, 작가가 투영된 캐릭터인 딸 미나의 관점에서 아버지인 귀용의 반려는 자신의 어머니인 음천이요, “작은어머니”인 수양은 그렇지 않다. 음천은 뭐가 되고, 수양의 인생은 또 뭐가 되는지. 귀용은 귀용이라 그렇다고 쳐도, “배울만큼 배우고 미국까지 간 딸”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어떻게든 아버지 곁에 묶어 두는 것이 어머니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나 싶어지는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어쨌든 수양의 초야에 음천은 홧병으로 쓰러지고 몇달을 자리보전을 한다. 음천에게 미안하네 어쩌네 군말은 많지만, 귀용은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는 듯 수양과 합방을 하고 수양은 임신을 한다. 자리보전 하다가 겨우 정신이 든 음천은 어느새 이 집안 식구가 된 수양을 보며 체념한다. 물론 수양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첩이라도 자신이 시집을 왔는데 빨리 임신을 하고 자리를 잡는 게 살 길인 것이 맞고, 이 상황에서 수양을 내팽개쳐 둔다고 한들 귀용은 여전히 무책임한 인간이겠지만. 나는 이 귀용이라는 인간보다는 귀용에게 자꾸만 면죄부를 안겨주고 싶어하는 작가에게 짜증이 났다. 이 장면 이후로 거의 엔딩까지 나는 음천과 수양이 손잡고 저 새끼를 죽이는 장면은 안 나오나 내심 생각했는데, 당연히 이 소설은 스릴러가 아니어서 두 여자가 손잡고 저 맺고 끊는 것 없는 남자를 베개로 눌러버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독자만 복장이 터질 뿐이다.

수양이 임신을 하고 곧 아이가 태어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귀용은 음천에게 미나와 함께 먼저 피란을 가라, 자신은 어머니 모시고 수양도 데리고 따라가겠다며 음천 모녀를 먼저 보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어머니와 (아마도 아들을) 임신한 첩이라는 “단란한 가정”이다. 이 시점에서 귀용은 자신이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내와 딸(업둥이)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로 연결되는 핏줄을 운명공동체, 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음천이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의 간병에 성심을 기울였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도 없고, 그저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된다. 내용상 똑똑하게 행동하는 묘사가 거의 나오진 않았으나 똑똑하다고 언급되는 음천은, 미나만큼은 공부를 많이 시켜서 이런 여자의 “뒤웅박 팔자”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음천이 미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전쟁 전후로 헌신하는 장면들과, 당시 여성의 고생과 한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대목들은 인상적이었지만(……) “자전적 소설”이자 “남편을 잃은/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똑똑한 여자가 자기 닮아 똑똑한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의 분야에는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있다 보니 이를 넘어설 정도로 독보적인 장면은 아니다. 게다가 음천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순종적이며 보수적이고, 어언 고등학새이 된 미나의 시선은 그런 순종적이고 보수적인 음천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한편, 아버지인 귀용이 작은어머니인 수양과 수양이 낳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음천과 미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데 그치고 있다. 분명 사춘기를 거치는 딸의 시각에서 부모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묘사할 만한 부분들이 있고, 또 귀용이 말로야 음천과 미나가 소중하다고 할지언정 그는 수양과 그의 아들들과 살고 있고, 그의 생활비도 대부분 그쪽으로 가고 있으며, 음천 앞으로 해 주겠다고 한 집도 결국 귀용이 숨지며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인데도, 작가의 시각은 일관적으로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고,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는 지극한 행복회로 돌리기로 귀결된다.

그리고 음천이 그렇게 고생해서 키웠다는 미나가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 가고, 현대로 넘어가 2005년에 한국에 잠시 귀국하는 장면으로 전환되면서, 독자는 다시 한 번 환장할 만한 경험을 하게 된다. 환갑이 된 미나가 한국에 돌아왔으면 부모의 관계에 대해 어떤 부분은 이해하고 어떤 부분은 비판하는 식으로 넘어갈 법도 한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미나의 공격은 뜬금없이 “반미”로 향한다. 어쩐지 미나가 무려 고등학교 다닐 때 시위 행렬을 보면서도 저기 참여해야 할까, 근데 나는 발레나 미술같은 걸 하고 싶은데, 하며 외면하기나 했던, 지식인으로서는 대가리가 꽃밭이라고 해도 뭐 변명할 말이 없을 것 같은 묘사가 중간에 나오더니만. 한국에 돌아온 미나는 정말 문자 그대로 “박정희 때나 전두환 때 유학가서 정치 관점이 딱 그때로 고착된 미국 간 친척”같은 관점으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반미 시위(미군 장갑차 사고 및 매향리 무렵임)를 비판하며, 이야기의 전개와 하등 상관없이 “미국이 없었으면 지금 저기서 데모하는 놈들도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햇볕정책과 관련된 글을 보면서 “하하 잘들 해봐라”하고 조롱하는 것은 물론, 나름 민주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 치고는 너무나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당파싸움의 DNA” 운운하며 정치활동에 비판적으로 구는 등, 미나와 음천, 작은어머니인 수양의 관계와 상관없는 친미 우익 꼴통같은 소리를 잔뜩 해 댄다. 앞부분의 “아들 낳자고 마누라 버리고 첩을 둔 사내”를 있는 힘을 다해 좋은 사람처럼 금칠하는 것도 짜증났으나, 막판에 개연성 없이 작가의 친미 우익적인 관점을 아주 쓸어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책 뒤에 똑똑한 여성이 습속의 포승줄에 묶인 이야기라는 말과는 별개로 주인공인 음천이 저 남편에게(전쟁 일어나니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과 딸만 따로 보내고, 자신은 “어머니”와 “자기 아들을 임신했을지 모르는 첩”만 데리고 피란가는) 지순하다 못해 그냥 저 혼란기에조차도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자라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 당대의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이 여성의 마음과 시선은 현실 밖을 볼 수도 있어야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적어도 이 여성이 희망을 두었던 “지식인 딸”은 어머니가 겪은 간난신고에 대해 “불쌍한 우리 엄마”보다는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았나. 이건 그냥 1950년대 여성 잔혹사+친미우익 딸 이야기 아닌가.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인인 고모가 굿을 하는 장면, 즉 1950년대 가정집에서의 굿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이건 아마도 작가가 그 시점에 그런 굿들을 보고 자라다가 그대로 미국에 가면서 이후의 탄압이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채로 기억에 남은 장면들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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