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선생님과 한국 만화와 IT 기술에 대한 잡담

어제 트위터 DM으로 @skyjets_ 성상민 선생님과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김진 선생님과 한국 만화와 IT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 천리안 유저, 아래아한글 번들 토끼 이미지, 아래아한글 책, 넥슨 “바람의 나라”, “푸른포에닉스”와 “러브메이커”와 “조우”, 그리고 We6까지.

일단 우리가 대충 아는 이야기들

우선 김진 선생님은 상당히 초기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만화 작업에 도입하려고 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인지는 공개된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일단 아래아한글에 번들로 들어간 토끼 그림 이미지가 있었죠. 당시에는 이미지 파일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데는 그 이미지가 다 쓰이곤 했는데, 그때 이미지가 조조사의 토끼 가족들과 디스켓, 모니터였을 것입니다. 지금 저도 이미지 파일을 갖고 있진 않은데 한글 1.5, 2.0에 들어 있었던 것 같고, 앤서블 토크에 올라온 김보영 작가님 글에도 언급이 되지요. 이후 길벗에서 나온 아래아한글 매뉴얼에는 바람의 나라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의 SD 이미지들이 사용되었고요. 창세기전의 캐릭터 디자인 및 넥슨의 “바람의 나라”에 원작을 제공하며 한국 게임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1990년대 작품에도 작업에 컴퓨터를 꾸준히 사용하셨고, 작품 내용에도 그런 내용들이 아주 자연스럽고 짧게 나옵니다. 예를 들면 IT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에서는 선배를 협박하기 위해 회계 프로그램에 고의적으로 버그를 넣는 이야기가 나오고, “숲의 이름”에서는 부산에서 후쿠오카에 배 타고 가서 요도바시에서 전자제품 떼어오는 이야기가……

푸른 포에닉스

1988년, 푸른포에닉스가 만화왕국에 연재되었습니다. 이 시기 김진 선생님은 동아리 AAW(대인전기 무혼의 홍성혁님, 열혈강호의 양재현님 등)에 푸른포에닉스의 함선 등 여러 메카닉 디자인을 의뢰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김진 선생님께서 일부 작업에 CAD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시기가 맞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AutoCAD 자체는 1980년대에도 설계 등에 쓰이던 것이니 가능성이 있어 보이네요. 다만 지금 우리가 스케치업 쓰듯이 직접 설계를 3D로 돌려서 이미지로 추출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3D로 설계를 뽑고 작업은 그걸 참조해서 수작업 하신게 아닐까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메카닉을 메카닉답게 뽑아낼 수 있는 쪽에 디자인 외주를 주고, 그걸 만화에 도입한다는 것은 당시 매우 선진적인 개념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김진 선생님도 이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알고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일부 남성 독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여성작가니까 메카닉에 약해서 외주 준 것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요. (정말 그때 그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같잖은 소리입니다.) 1999년 “쎈”지에 푸른 포에닉스가 재연재되면서 함선이나 위성 같은 메카닉을 직접 다시 디자인하고, 이를 라이노, 3dMAX 등으로 모델링해서 본격적으로 작품에 사용하시게 됩니다. 푸른 포에닉스 연방과 고르고니아 연방, 그리고 공용어의 문자를 폰트로 따로 만들기도 하셨고요.

러브메이커

그 이전에 1992년,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러브메이커”. 이 작품 1권에서는 디스켓으로 게임을 복사하던 그때 그 시절이 배경인데, 주인공은 친구가 준 인디게임을 넣고 실행했다가 그만 컴퓨터 게임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컴퓨터바이러스 등에게 쫓겨 다니게 되죠. 1권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아니더라도 재믹스 같은 가정용 오락기로라도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2권이 문제인데요.(문제는 아니고)

2권에서는 주인공이 들어가는 게임이 모뎀 통신으로 올림푸스 서버에 접속하는 네트워크 게임이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표면에는 천재 게임 개발자인 삼형제(남매)의 티격태격과 주인공 커플의 연애가 있지만 알맹이를 까 보면 서버와 네트워크 통신이라든가, 온라인 게임의 기초적인 개념들이 들어가 있는데. 근데 그때 아직 MMORPG는 고사하고 MUG도 나오기 전이었거든요. 어떤 독자들은 이걸 동시대에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오는 게임 형태는 자유도라든가, 생각하면 아마도 울티마 같은 것을 생각하셨던 것 같지만, 울티마가 온라인 게임이 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고. 그 전에 다이렉트 접속해서 즐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한국 최초의 게임판타지, 게임빙의물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정확히는 장르 이름도 생기기 전에 나와버린 거죠.

We6와 새로운 연출

“허브”에 연재되었던 “조우”의 경우는 음산하고 난해한 분위기가 나는 만화였는데, 기술적으로는 당시 어디까지 CG를 사용할 수 있는가를 극한적까지 실험적으로 넣었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에서 “아햏햏햏햏” 같은 말이 나오는 장면에서 좀 당황하기도 했지만.

창작 도구로서의 기술, 과 PC통신,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 1980년대 후반 이후로 계속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하고요. 사실은 2003년 나왔던 만화웹진 We6에서의, 모니터 비율에 맞춘 연출도 그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2003년이면 라이코스 웹툰이 있었고, 다음과 네이버에서 웹툰 서비스를 아직 ‘간만 보던’ 시기입니다. 강풀 작가님 “순정만화”가 2003년 말에 나왔고요. 스크롤 연출이라는 것이 아직 개념만 있는 상태였습니다. “순정만화”와 스크롤 연출의 시작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이야기가 나왔다고 생각하니 생략하고.

근데 이 2003년 여름에 김광성, 김기혜, 김진, 김혜린, 장태산 선생님이 We6라는 유료웹진을 만드십니다. 코엑스에서 작은 부스를 내고 거기서 연재 작품들의 일러스트를 홍보영상으로 보여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이때 We6에서도 선생님들의 이전 작품을, 종이책을 펼침면으로 스캔해서 제공하는 형태로 서비스를 했습니다. 사실 모니터 비율에 맞춰서 책을 펼쳐 보여주는 웹진 자체는 그 이전에도 핫툰(hottoon)도 있었고, 라이코스에서도 일부 그렇게 서비스한 만화가 있었고, 게시판 프로그램과 연동해서 동인지 등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플러그인도 있었습니다. 시기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서찬휘 평론가의 개인 홈페이지에서도 PHP로 그런 화면을 구현한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We6에서 김진 선생님이 하신 시도는, 종이책을 그대로 펼침면 스캔한 것이 아니라, 한 페이지 자체를 모니터 비율 4:3에 맞춘 화면 연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웹툰의 스크롤 연출이 대세가 되기 전, 모니터 비율에 맞춘 웹진이 나왔었는데. 사실 무슨 말이냐 하면 종이책용 연출 따로 하시고, 그걸 다시 4:3 비율로 연출을 다시 짜시고. 그 형태로 나온 단행본이 “레테” 영문판 단행본일 겁니다……

스크롤 연출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는데, 공간감을 깊이 나타내거나 정적을 보여주기가 쉽지가 않은 문제가 지금도 있죠. 지금도 웹툰에서는 과거 종이책에서 클라이맥스 등에 자주 사용되던 펼침면 연출 등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작가님들과 독자님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물론 모니터 비례에 맞춘 4:3 연출이 이 문제를 아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새로운 디바이스에서 새롭게 화면을 보여줄 때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구현된 형태였습니다. 사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종이책용 펼침면을 다른 매체에 이식할 때, 혹은 다른 매체를 다시 가로폭이 넓은 화면으로 이식할 때의 연출에 대한 연구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연출과 독자의 시선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라든가요.

일본 만화의 연출을 한국 만화에서 그대로 가져오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쪽은 우철 세로쓰기고 우리는 좌철 가로쓰기니까. 근데 꼭, 가로쓰기인데도 말풍선을 세로로 길게 쓰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 여튼 말풍선의 형태와 크기와 배열, 인물들의 시선, 인물의 중심선, 화면을 돌리는 방법 등등 연출 면에서 비슷하지만 원리를 이해하고 다르게 써야 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이런 것은 우철 좌철 글자 방향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매체가 달라지면서 더 커져야 하고요.

저는 한국 웹툰의 스크롤 연출은 아직도 발전중이라고 생각하고, 발전 가능성이 한참 남아있는 미답지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극한까지 몰아붙인 연출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올컬러 주간연재 회당 70컷 상태에선 쉽지 않겠죠. 여튼. 아직 새로운 매체에서의 스타일은 고사하고, 가로 스크롤과 세로 스크롤 중 어느쪽이 대세가 될 지도 알 수 없고, 기존 만화를 그냥 펼침면으로 스캔해서 서비스하면 되나 고민하던 시대에 나온 4:3 모니터 화면 기준 연출은, 실제로는 현재 쓰이지 않는 기술이라는 점에 더, 연구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매체의 연출을 연구할 때 우리가 컷의 형태, 모양, 분배, 해상도, 가로세로비와 화면 크기, 말풍선의 형태, 위치, 인물의 움직임과 독자의 시선 움직임을 어떻게 상정하고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강력한 참고자료가 되지 않을까 (게다가 그 연출을 짠 분의 연출력을 생각하면…..) 싶기도 하고 사실 저는 콘티연출에 관심도 있으니까 조금 연구한 적도 있습니다만(……)

일단 지금은 그 연출에 대해 아는 분이 거의 없고(몇년 서비스하다 사라진 웹진과, 지금은 실전된 4:3 연출)

그런 이야기를 하면 “김진 님은 천재시니까 그게 되고 우린 아님” 같은 소리를 몇번 들었어서.1그리고 저는 그런 말을 무척 비겁하게 생각합니다. 김진 선생님이나 요시나가 후미 선생님이 천재이신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연구도 안 할 거냐고.

어쨌든 저는, 지금 현재로서는 만화연출은 거의 5, 6년째 안 하고 있는데다 누굴 가르치는 것도 아닌 제가 들이 팔 상황은 아닌것 같고, 덕후인 저에게야 아까운 기록 정도겠습니다만 연구자님들은 또 다른 것들을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무엇을 뽑아서 이것을 만들었는가, 그런 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정리를 해 주시면 후대의 작가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 : 누군가 연구좀 해 주시죠. 저는 지금 만화 연출을 안 하지만 그 근처 어딘가에 원피스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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