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책들은 웬만하면 읽고 가급적 좋은 점을 찾아보고 감상을 짧게라도 남기는 편인데 읽고 너무 역겨워서 그렇게 못 한 만화책이 있었다. 니트족 남매 둘이 나오는 만화인 “일하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문제로 일을 하거나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계급이나 자본의 문제로 진학이나 안정된 직장으로의 취업 기회를 박탈당하는 이들도 많고, 슬럼화된 지역의 빈곤층들이 지리적으로 격리됨과 동시에, 도서관이나 공공 미술관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나 공원과 같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부터도 격리당해, 결국 문화를 접하지 못하고, 충분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좋은 학교에서 의욕적인 교사에게 수업을 받지 못하고 부모의 계층에 그대로 고착되며 좌절하기도 한다. 장애가 있거나 그밖의 여러 문제로 교육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 “일하지 않는 두 사람”에 나오는 남매는, 자신에게 그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고 있고, 사회생활을 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나중에 보니 이따위 인간들이 나오는 만화가 십수권이 나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뭘까, 궁금했지만 만화책을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른 식으로,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남매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무언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이 적극적으로 니트가 되려고 애쓰며 부모에게 빌붙고 있는 꼬라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역겨웠다.
‘파랑새’를 찾아서 ‘여기와는 다른 장소’를 찾고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것’을 거부하는 동안 도저히 운신할 수 없을 정도의 곤궁에 빠져버린다. 니트는 이런 과정으로 형성돼왔다.
사실 비슷한 시각에서 웹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도 썩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이쪽은 포기에 이르는 과정은 납득이 간다. 블랙기업에서 일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번아웃이 올 대로 온 젊은 주인공이, 어머니도 돌아가시며 약간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전개는. 여튼 거기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뒤늦게 자아를 찾든 힐링을 하든 이쪽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뭐라도 한다. “일하지 않는 두 사람”의 남매가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엄을 끌어내리며 사회로의 복귀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스스로를 더욱 약자로, 하향화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쪽은 어쨌든 에너지가 바닥난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 자신을 돌보고 에너지를 모으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욕망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결이 다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불안한 현상들이 보였다.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였다. 이를테면, 사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도없이 나오는 말이니까 “사흘”의 뜻을 모른다는 게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래도 3일이라는 뜻의 “사흘”이 “사”가 들어갔으니까 4일이 아니냐고 착각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걸 지적했을 때 “‘사’흘이니까 4일이지 무슨 개소리냐”는 식으로, 자신의 잘못된 지식을 결코 정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누군가 지적해줘도 배우거나 고치려 하지 않고 상대를 꼰대취급하면서, 그런 것을 잘못 알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주장하는(실제로는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다. 사흘을 모르고, 금일을 모르고, 우천시가 부천시 옆에 있는 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말이다. 뉴스에나 나오는 극히 일부의 예 같지만, 그래도 다른 SNS에 비해 책 좀 읽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인 편인 트위터(X)에서조차도 그런 이들은 종종 목격된다. 이들은 모르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적고 잘못된 지식을 진리인 줄 알며, 어떤 일에 대한 지식이 시계열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 정말 왜 인간이 저렇게까지 반지성적인가 생각하게 되는 이들이다.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자기가 했던 일은 다 옳았다고 정당화 해 버리면 그 ‘옳은 행위’는 자꾸 반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는 인간은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 지향”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교에서 일하던 2008년, 2009년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는 이런 문제도 있네 하고 읽었는데, 일본에서 일어난 썩 좋지 못한 현상은 약 10~20년 뒤 한국에서 그대로 일어나더라는 이야기처럼, 지금은 이 책에 나오는 인간상들이 제법 흔해졌다. 그리고 우치다 다쓰루는 이와 같은, 청년층의 니트화, 반지성적인 문화를 “소비주체로서의 정체성”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니트들은 등가가 아닌 교환에는 결코 응하지 않는 ‘영리한 소비주체’로 자기를 규정하고, 여기서 비록 작으나마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고 있다. 이 상태를 고수하는 이상, ‘공부’와 ‘노동’과 같은 본래 등가 교환이 아닌 역동적인 과정 속으로 들어가겠노라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결심하는 일은 없다.
2008년 우치다 다쓰루는 도쿄대학 교육학부 사토 교수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한 “공부로부터의 도피, 일로부터의 도피”를 인용하며 이 책을 썼다. 부정확한 자기평가로 인해 자신의 학력 저하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은 물론 남이 공부하는 것도 거북해하는 풍조가 만연하며, 모르는 것이 있어도 찜찜해 하거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비대해진이들의 이야기는 2024년 현재, 우리 주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 자립하기 이전에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먼저 갖다보니, 교육을 권리라고 생각하지도, 의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선택해서 구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례들은 남의 일이 아니다. “교육 서비스”를 “구매”함에 있어 다른 대가를 내놓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수업시간을 참는 불쾌감”을 일종의 화폐라고 생각하고, 불쾌함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불평하는 쪽이 승자이며, 온 힘을 다해 아무 것도 안 하거나 제공된 상품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이익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SNS에서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꾸 튀어나오는 모든 일에 자신이 피해자이고 싶어하는 인간상들이나, 각종 악성 민원인들이 왜 나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현실에서 본 사례들을 생각하다 보니, 다시 만화 “일하지 않는 두 사람”에 대한 격렬한 역겨움이 떠오른다. 자발적 니트를 모에화 해 줄 필요가 있나? 그들의 과잉 클레임, 악성 민원, 모든 일에 자신들이 피해자여야 하고, 온 힘을 다해 아무 일도 안 하려 하며 다른 사람의 노동에 얹혀 가고, 성장하거나 배울 생각이 없는 태도들이 사회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니트들이 부양자가 죽은 뒤에도 사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지 시스템을 갖추고, 자본주의적 소비주체가 아닌 생활주체로서 다음 세대들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 보면 앞날이 캄캄하기도 하다. 예전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정말로 이런 식이라면 일본은 다음 세대가 지날 때 쯤에는 거의 망조가 들겠는걸,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서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