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고교 교사인 한신은 소설가다. 이민 2세인 그는 아버지가 겨우 집을 마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빚을 갚으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중심으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그 안에서는 약자에 대한 동경과 멸시가 은은히 깔려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그들 모자들은 약자였고, 살아남아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던 신에게 있어 팍팍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탈출구는 장르소설 뿐이었다. 성장하여 교사가 되고 자기 힘으로 돈을 벌게 된 신은 옛날에 좋아했던 80년대 소설들을 사 모으지만, 자신이 현실에서 받는 편견과 차별이 그 시절의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읽지 않게 된다.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신은 본인은 만족스럽지 않을지언정 꾸준히 성과를 내고, 여섯번째 소설은 드라마화가 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하다. 그의 주인공은 화이트워싱되고, 담으려 했던 메시지는 퇴색된다. 작가로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현실 앞에 좌절하던 신은 1980년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레이건의 대통령 선거가 목전인 그 시기, 고등학생이 된 신은 보수적인 신문에 소설을 보내고, 레이건의 당선으로 보수 일간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대통령 선거 다음날부터 연재하도록 시기를 조정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담당 편집자인 사이먼 카버는 손으로 원고를 쓰고 있는 신에게, 선배인 줄리아 챈들러가 두고 간 물건이라며 레이먼드 챈들러의 서명이 남아 있는 타자기를 보내준다.
회귀한 한국인 2세 작가가, 1980년대 미국에서 장르 소설, 소위 펄프 픽션을 쓰며 이 세계의 장르 소설들을, 업계의 관행들을, 그리고 동양계나 흑인을 압박하던 인종차별의 벽을 넘으려 하는 이야기. 예술가가 환생하는 계열의 이야기에서 흔히 그렇듯이, 그 시대에 아직 나오지 않은 소설이나 사조를 참고한 가상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특히 첫 극중 작품인 Mother는 스티븐 킹의 캐리를 연상하게 하는 면이 많은데다, 스티븐 킹도 작가가 되기 전에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다 보니 앞부분을 읽으면서 “설마 회귀해서 스티븐 킹이 되는 이야기인가.”하고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중간에 이 시대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레옹의 아이디어를 참고했다고 적어놓은 이야기도 있고, 수퍼 히어로물의 몇몇 대목은 “초인동맹”을 연상하며 읽었다. 그밖에도 여러 익숙한 이야기들이 1980년대를 배경으로 신선한 이야기가 되어 튀어나오는데, 맛보기로 보여주는 작중작들이 꽤 흥미진진해서 이 이야기들 중 몇가지는 개별적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이전 생에서 신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 앞에서 몇번이나 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두 번째 생에서 신은 과거의 경험들, 계약이나 이후 역사에 대한 지식들, 장르소설의 발전에 대한 지식과 관점, 그리고 과거 작가로서 쌓았던 경험치들을 무기삼아 현실의 벽을 무너뜨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전 생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 믿을 수 있는 편집자와의 교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 같은 것들을 통해 구원받는 한편,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또 다른 편견들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너드인 두피는 부유한 흑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장난감 회사 사장이다. 하지만 그는 흑인들에게서는 백인에 아부한다고 따돌림당하고, 소득 수준이 비슷한 백인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 그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너드 집단들, 그리고 당대의 서브컬처들 뿐이다. 신의 또 다른 친구인 알렉사는 금발 백인 치어리더, 누가 봐도 유행을 선도하는 외향적인 인기인이지만, 그의 부모님은 재혼을 통해 다인종간의 결혼을 하셨고, 그의 의붓오빠인 덴젤은 흑인이다. 다인종간의 결혼이 아직 터부시되던 이 시대에, 알렉사는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 없다. 사실 알렉사가 처음 나오고 신과 가까워질 때, “아시안 작가가 성공한 뒤 금발 백인 치어리더 출신의 ‘소꿉친구’와 순애 끝에 결혼하는” 트로피를 얻는 스토리가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차 명성을 떨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신의 첫 소설 Mother의 단행본 일러스트를 맡아 준 덴젤이 나오면서 그의 이야기가 단순히 금발 백인 치어리더 트로피 와이프에 소꿉친구 서사 끼얹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좀 안심했다. 초반에는 신과 두피가 각종 오타쿠 토크를 나눌 때마다 마치 “빅뱅이론”의 페니처럼 나오는 것 같았던 알렉사도, 시간이 갈 수록 이들과 어울리며 물들어간다. (……) 여기에 코리아타운의 이웃에 살고 있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지우가 가담하며, 이들은 TRPG 4인팟을 꾸리게 된다. (TRPG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같이 할 친구를 구하는 것이라는 지금 시대에, 정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과 알렉사와 두피, 여기에 몇살 어린 지우까지 더해서, 이들은 당대의 코믹스와 TRPG, 막 태동하던 비디오게임 등 1980년대 서브컬처들을 실시간으로 누린다. 여기에 더해 신은 창작자로서, 소설을 쓰고, 자신의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또 완구로 만들어지는 현장을 바라본다. 또한 1980년대는 여전히 팍팍하고 편견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의 글을 읽은 독자들은 신의 메시지의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의 모순을 바라보거나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작가가 꿈꿔볼 만한 것들인 것 까진 좋았는데.
엔더의 게임이 네뷸러를 받았어야 할 바로 그 해에, 주인공이 네뷸러를 받는다. 그냥 받는 게 아니라, 이 대목에서 그랜드마스터급 존잘들이 총출동하여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아직 20대 초반인 그의 미래를 축복한다. 아니, 그런 축복 안 받아도 되니까 존잘님들이 가득한 그 자리에(특히 어슐러 르 귄이 아직 살아계신 그 자리에) 가보고 싶다고.
작가 회귀물을 몇개 읽어보았고 얼마전에는 꽤 불쾌한 것도 읽었는데, 이 이야기는 “빻은 시대인 80년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의 벽을 넘고” “종종 자기반성을 하는” 주인공을 내세워서 거북한 부분들을 많이 상쇄시켰다. 무엇보다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어제 오후 읽기 시작해서 앉은 자리에서 현재 연재분까지 다 따라잡았다. 신작이 나올 때 마다의 전개는 주인공이 신작을 쓴다->편집자가 감탄한다->연재 시작->독자들의 반응->대성공의 원 패턴이지만, 각 신작마다 작중작 형태로 신이 쓴 소설의 주요 부분(그것도 꽤 흥미롭다)을 발췌해 보여주는 형태로 전개되다 보니 원 패턴이라도 지루하지 않다. 시상식장에서 작가들 반응까진 그렇다고 해도, 드웨인 존슨이 신의 소설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거나, 팀 버튼이 탐내거나 하는 실존인물들이 나오는 대목들은 역시 좀 거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