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 기억한 것은 1987년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때 내 또래의 아이들은, 대선 포스터를 보고 김대중은 어쩐지 좀 무섭게 생겼다거나, 노태우가 웃고 있어서 착해 보인다거며 재잘거렸다. 나도 그랬던 어린이들 중 하나였지만,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는 슬로건은 정말 이 슬로건을 만들려고 당 이름을 지은건가 싶을 정도로 잘 만든(35년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슬로건라고 생각했었다.
……..여튼 노태우가 착해 보인다니 이게 무슨 아무리 국민학교 2학년이라고 해도 변명이 안 될 흑역사인가 하고 그 당시의 대선 포스터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노태우는 역동적인 포즈로 웃으면서 찍었고, 무엇보다도 컬러로 화사하게 찍었는데, 김대중은 흑백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린이의 눈에는(…….) 지금 나이들어서 이 포스터들을 다시 보고 있으면, 그라데이션이나 디테일한 색감이 필요한 후보 얼굴은 흑백으로 가 놓고 글씨도 검은 두루마기 위로 몰아놓고, 나머지도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만 달랑 쓰다니. 인쇄비 절감을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1980년대 당시 어린이 백과사전에는 컬러 사진 인쇄 방식으로 요판인쇄(그라비아 인쇄)가 있는데 비용이 비싸고 어쩌고……가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고 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게 그 대선을 거치며 나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과, 그리고 백기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기호 8번이었던 백기완 선생을 기억하게 된 것은 뻗친 머리에 빗질을 안 하고 찍은 듯한 포스터와, 이동도서관에서 봤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때문이었다. 책 표지를 보고 “앗, 그 머리 뻗친 사람”하고 생각했….. 그 책을 실제로 읽은 것은 십년쯤 뒤의 일이었고.)
……그런데 이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은 바로 이 1987년 대선 직전에서 끝난다. 하의도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원대한 꿈을 꾸었던 영리한 소년이 사업가로, 다시 정치가로 활약하며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1987년, 16년만에 광주에 찾아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다. 1980년에 태어난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선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그 압도적인 사진을 신문에서 보며 이 사람은 누구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걸까 궁금해 했던, 바로 그 직전의 일.

섬에서 태어나,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해서 목포상고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는 해운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배를 인수하고 해운 사업을 하던 유능한 청년이었던 김대중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있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목포로 돌아왔을 때, 자본가라는 이유로 인민군들에게 죽을 뻔 한 일,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과, 군수비리로 수많은 청년들이 굶어죽었던 국민방위군 사건 등 무고한 시민을 향한 정권의 횡포와 무책임을 바라보며, 김대중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생각한다. 전쟁과 평화, 사상과 이념, 그 갈림길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길을 이루기 위해 정치를 택한다. 그러나 정치의 길은 쉽지 않다. 4전 5기, 국회의원이 될 때 까지 네 번이나 낙선을 거듭하며 그 많던 재산은 거의 다 사라지고, 미용사로 일하며 뒷바라지하던 아내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그는 책과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하고, 글을 쓴다. 장면 정부에서 그를 아직 당선 전의 그를 대변인으로 지명한 것도, 그의 정연한 말과 글, 그리고 거침없이 답변을 내놓는 지식과 철저한 논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겨우 의원이 되자마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다.
이후 김대중의 삶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은 김대중 평전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쉽게 보기 힘든 자료영상들과 자료사진들을 통해 당시 현장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엄혹한 독재정권 치하에서, 정치인이자 연설가로서 정권에 맞서며 두각을 나타내던 김대중이었지만, 그는 당내에서 비주류였다. 그는 거제도의 도련님 김영삼과의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지방의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발로 뛰고, 시민들을 만나 수많은 연설을 한다. 그야말로, 길 위에서, 대중 속에서.
“민주주의는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비주류 정치인, 4전 5기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은 채,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던 김대중의 삶은, 영화의 중후반, 박정희의 경쟁자로 대두되며 본격적인 시련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김대중의 시련이자, 민주주의의 시련이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일본에서는 납치되어 현해탄에 가라앉을 뻔 한다. 잠시 서울의 봄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김대중과 아들 김홍일, 측근들을 체포하고,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석방, 그리고 전두환 퇴진을 외치던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다. 그리고 한달 뒤에야 당신이 갇힌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고, 광주에서의 학살을 신군부의 입맛대로 기록한 신문 뭉치를 던져준다. 김대중은 “빨갱이”로 몰리고 “내란죄”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국민과 역사를, 민주주의의 회복을 믿는다. 자신이 증오와 모욕과 정치보복의 대상이 되어 죽어도 저들을 증오하지 말고, 용서할 것을 당부한다.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은, 그를 성스러운 길로 이끌고 있었다. 물론 후세 사람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전두환 새끼를 용서하면 어떡해요.”하면서 안타까워했지만, 어떻게 그런 대목들을 울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살해하려 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보며, 야당 대표에 대한 검찰의 끝없는 압수수색과, 불과 며칠 전 있었던 피습 사건, 그리고 지난 대선 때의 둔기 테러를 생각하니 더 착잡했다. 지금이 2023년인데, 1970~80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며 현재진행형인 사건들을 떠올리고 있다니.
아시아의 민주주의 지도자이사 사상가로서 그 존재감이 결코 작지 않았던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진다.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감형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을 핑계로 그를 미국으로 보내려 한다. 국정원 사람이 설득하러 와서 글을 적어달라고 하자 김대중은, 적어주면 정치적으로 이용할 게 아니냐며 거부한다. 국정원 사람은 치료도 하고, 동지들도 구해야 하지 않느냐며 간곡하게 설득한다. 감옥 안에서의 그 영상과 음성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김대중이 감시받았다는 뜻이었겠지. 결국 김대중은 국정원 직원을 통해 전두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어 주고 미국으로 떠난다. 그 대목을 보면서도, 전두환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십년 뒤 그 전두환의 찌꺼기같은 일베 놈들이 그 글을 “앙망문” 운운하며 낄낄거리고 조롱했던 것을 떠올렸다.
1985년, 김대중은 돌아온다. 그 얼마 전 필리핀의 아키노가 귀국하자마자 암살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여러 기자들과 정치인 등이 김대중의 귀국길에 함께 했다. 돌아와서도 그는 가택 연금을 당한다. 글과 메모들을 화단 밑에 파묻으며, 그는 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학생운동, 1987년, 6.29 선언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과, 김영삼과의 협력과 갈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김대중은 광주로 향한다. 광주에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16년만의 일이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하고 7년만의 일이다. 과거 그의 출신지와 그를 향한 호남의 지지를 “지역감정”으로 폄하하던 정권과 경쟁자들, 그리고 언론들을 의식하듯 “호남”의 정체성에 거리를 두었던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무덤과 유족들 앞에서 통곡하고, 자신의 “호남”으로서의 정체성을 체화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대통령 후보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나레이션은 말한다. “지역감정, 빨갱이, 거짓말쟁이”라는, 정권과 언론이 만들어낸 김대중의 이미지를. 그 이미지로 인해 앞으로 그가 겪어야 할 새로운 고초를 암시하듯이.
“길 위에 김대중”은, 그렇게 1987년에서 끝난다. 조금 어정쩡한 결말이 아닌가 싶지만, 세 번의 대통령 선거 낙선을 연거푸 보여주려면 두 시간으로는 모자란 것도 이해가 간다. 다행히 속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속편이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사람들이 이 영화를 더 많이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도 중간에 박정희와 윤보선의 1963년 대통령 선거가 나오는데, 박정희 46.64%, 윤보선 45.09%로 고작 1.5% 차이였다. 1997년에도 김대중 40.27%, 이회창 38.74%로 고작 1.53%. 2002년 노무현 48.91%, 이회창 46.58%로 고작 2.33% 정도. 2012년에 박근혜 51.55%, 문재인 48.02%으로 3.53%로 패배한 것은 큰 차이로 느껴지지도 않을 수치다. 2022년 윤석열 48.56%, 이재명 47.83%의, 0.73%의 차이도 생각하게 되지만, 그 이전에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부정선거를 하고서야 이겼던 이승만이, 치밀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30% 나 득표했던 조봉암을 사법 살해했듯이, 1971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던 박정희가, 그 모든 공작과 방해해도 불구하고 아직 젊은 김대중이 자신을 상대로 45.25%를 득표하자 유신 체제를 선언하고, 김대중을 살해하려 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그 숫자가 결코 덮일 만큼 적은 것이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상대를 죽여버리고서야 안심할 수 있을 만큼,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지금이 있다. 그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