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치백

헌치백 – 이치카와 사오, 양윤옥, 허블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텐데. 출산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육아도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다. 생식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서 임신과 중절은 해보고 싶다.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

중증 장애인으로 인공호흡기와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는 작가 이치카와 사오가 쓴, 중증 장애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하지만 주인공인 이자와 샤카가 트위터에서 비계를 파고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거나, “임신과 중절을 해 보고 싶다”는 글을 올리는 이 소설을 두고 언론은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전복적이라는둥, 위악적이라는둥. 실제로 그렇게 무겁지 않은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기사를 쓰거나 통과시킨 기자 대부분이 남자겠구나 싶었다. 남자들은 아마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아니, 알아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세상에는 결혼은 하기 싫지만 아이는 낳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아주 많다. 그 여자들이 다들 모성애의 화신이어서, 남자는 필요없지만 아이는 내 인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작으나마 내가 이룩한 것을 내 부모형제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상처받았던 어렸던 자신을 다시 처음부터 키워내고 싶어서, 그리고 내 몸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는데 사용해보고 싶어서, 여자들은 결혼은 하고싶지 않지만, 남자도 필요없지만, 아이는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샤카는 그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고, 딱히 드문 욕망도 아니다.

아이를 낳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떠올리는 여성들도, 대부분은 욕망만으로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결혼을 하면 뒤따라오는 시월드와 남편,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을 때의 사회적 불이익, 커리어와 건강, 온갖 현실적인 문제들이 뒤따르니까. 샤카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서다. 육아나 출산 이전에 임신 과정을 견뎌낼 수 없는 몸이기에, 샤카는 임신을 하고, 또 중절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처럼”이라고 말하지만 샤카의 욕망과 생각은 사실 매우 보통에 가깝다. 자신의 몸을 사용해보고 싶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 굳이 도발적으로 인식하고, 정상에서 어긋난 것 처럼 호들갑 떨 이유가 없다. 중절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말에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라는 남자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아버지가 될 생각은 요만큼도 없고, 상대에게 제대로 쾌락을 줄 생각도 없고, 심지어 아이가 생겨도 양육비를 보낼 생각도 없이 가짜 연락처를 남기고 도망치기나 하면서, 그저 다리 사이에 달려있다는 이유만으로 성기를 휘두르고 다니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중증 장애인이지만 부모님이 그룹홈의 토지와 건물, 그리고 임대 수입이 들어가는 맨션들을 남겨주셔서 부유하게 지내고 있는 샤카는 사회와의 연결 고리이자 세상에 통용되는 직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통신 대학에 계속 등록하고 있고, 프리라이터 알바를 계속한다. Buddha라는 계정으로 트위터를 사용하고 있다. 현실은 다섯 평짜리 방과 주방, 화장실, 욕실을 제외하면 제 발로 오락가락할 수 없지만, 그는 그 공간에, 혹은 척추가 휘어져 숨쉬기도 어려운 몸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29년 전부터 나는 열반涅槃에 들어갔다. 성장기에 미처 자라지 못한 근육으로 인해 심폐기능도 정상치의 산소 포화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동네 중학교 2학년 2반 교실 창가에서 몽롱하니 의식을 잃었을 때부터 줄곧.

남성의 “여성과 섹스는 하고 싶고, 그 결과물인 아이는 책임지고 싶지 않은 욕망”은 종종 “씨 뿌리기 본능”으로 미화된다. 여성이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고 싶고, 하지만 그 아이를 낳고 싶진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가난한 프리터인 다나카는 그런 샤카를 경멸하고 싶어하면서도 그의 돈은 원하고, 샤카는 섹스의 대가로 1억엔을 요구하는 다나카에게, 그의 ‘비장애인’몸에 가격을 붙이며 말한다.

“1억 엔.” 다나카 씨는 말했다. 귀여운 금액에 코 안쪽이 웃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내가 사후의 사용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액수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 “1억 5,500만 엔은 어때요?” 목을 누르고 나는 말했다. “다나카 씨의 키만큼이에요. 1센티미터당 100만 엔. 당신의 비장애인 몸에 가격을 매긴 거예요.”

사실 “임신을 하고 다시 중절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간병인을 성매수하려는 부유한 환자” 쪽이 늙고 부유한 남성 환자가 여성 간병인을 성추행하거나 성매수하고 첩으로 삼는 이야기가 떠올라 더 끔찍하지만, 자신을 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돈으로 되돌려주고,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멸시로 되돌려 준다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전복적이다. 그가 겪고 있는 차별, 자신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있는데도 차별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상황, 여기에 샤카가 갖고 있는 재산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더욱, 그의 임신을 하고 싶다, 그리고 중절하고 싶다는 욕망이 납득간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일들, 욕망과 차별과 사람들의 멸시와 동정,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실상에 이르기까지.

이 그룹홈의 토지와 건물은 내 소유로 되어 있고, 그 밖에도 맨션 몇 동에서 관리회사를 통해 임대료 수입이 들어온다. 부모님에게서 상속받은 억 단위의 현금 자산은 손대지 않은 채 여기저기 은행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나한테는 상속인이 없기 때문에 사후에는 모조리 국고로 들어갈 것이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위해 부모님이 평생 노력해 재산을 남겨주었는데 자식이 후계자 없이 죽어서 모조리 국고로 들어간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생산성 없는 장애인들에게 사회보장을 빨아먹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분들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조금쯤 체증이 내려가지 않을까?

일부 독자나 평론가들은 혐오스럽다고까지 말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읽다 보면 어째서 이 인물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면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에 연대한다고 말하면서도 ‘비장애인’의 몸을 가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차별과 그로 인한 생각들에 대한 추체험이다. 그리고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으로 인공호흡기와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는 중증 장애인인 작가의 말을 통해 40년 이상 자연스럽게 독서가로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는, 머리를 때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비장애인 우월주의)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중략)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비치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점자와 오디오북 정도만 생각했지, 종이책을 넘길 수 없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의 독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주변에는 평균보다는 장애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사실 내 주변의 장애인들은 대개 장애인이자 작가거나, 장애인이자 공무원들로, 받을 수 있는 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이동이 불편하거나 청각에 이상이 있거나 심한 색각이상이 있지만, 흑백으로 된 텍스트를 읽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이들이다. 전체 인구 대비 굉장히 좁은 풀인데, 그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는 이유로 자신이 장애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을 품게 되기도 한다. 그게 아닌데. 책을 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무지한 오만이었는데. 뇌성마비 환자와 근질환 환자가 쓰는 입력 장치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반성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중략) 책을 읽을 때마다 등뼈는 구부러져 폐를 짓누르고, 목에는 구멍이 뚫렸고, 걸어다니면 여기저기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내 몸은 살아가기 위해 파괴되어 왔다. 살아가기 위해 싹트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리하여, 비장애인 부부가 장애아를 낳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생학적 주장과,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생명권 침해라는 주장의 대립에서, 1996년에 이르러서야 장애인 커플이 아이를 낳는 것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현실에서, “그렇다면 장애인이 비장애인 아이를 잉태하고 낙태하는 것은 뭐가 나쁜가”라는 빈정거림은 지극히 당연하고 뼈아프다.

마지막에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샤카(紗花)의 이야기가 짧게 이어진다. 스스로 줄곧 열반에 들어 있었다고 말하는, 무성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장애 여성 이자와 샤카(釋華)와 Buddah(석가 : 샤카), 그리고 샤카(紗花)의 본질은 서로 이어져 있다. 마치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여러 생처럼. 그를 두고 작가는 말한다.

연꽃 주위의 진흙탕처럼 질퍽한 실을 그리는, 늪에서 태어나는 말들. 하지만 진흙탕이 없으면 연꽃은 살아갈 수 없다.

혼란스러운 여러 리뷰들과 달리, 인상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계속 던져주는 책이었다. 딱한 것은 가장 자극적인 부분만 골라서 쓰는 법 밖에 모르는 기자들과 책의 마케팅 방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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