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좋은 기회로 초청을 받아, 중국 청두에서 열린 2023년 세계 SF 컨벤션, 즉 월드콘에 다녀왔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은 가까이 있는 옆 나라인 점, 최근 김초엽의 소설이 중국에서 주목받고, 중국 성운상을 수상했고 은하상 후보에 오른 점, 그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었겠지요. 김보영, 김초엽 작가님을 필두로, 저와 해도연 작가님, 그리고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한 김준녕 작가님이 초청받았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번역가이신 이시아 선생님께서 우리의 중국행에 특히 많은 도움과 관심을 보여 주셨어요. (이번에 은하상 번역상 받으신 분) 회사에는 저의 겸직활동의 일환으로 초대받은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워낙 큰 행사이다 보니 나중에 트집잡힐 일 없게 추가로 서류들을 내 놓고 갔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는 것 역시 제 개인 연가 써서 가는 거죠.)

호수를 끼고 이번 행사를 위해 새로 지은 과환박물관이 있고, 그 주변은 세계과환공원이고, 그 앞에 쉐라톤 청두 피두 호텔이 있어서 많은 작가들이 그곳에 머물렀어요. 일부 작가들은 셔틀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인 시내의 윈댐(Wyndham) 그랜드 호텔에서 지냈고요. 결론만 말하면 개인적으로 왔다면 윈댐 쪽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게, 그쪽은 도심이고 관광지이고 주변에 야시장이나 마트 등이 있고 돌아다니기도 자유로운 반면, 과환박물관 주변은 이번 행사를 위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어서, 길에서 행사 셔틀버스와 경찰차를 제외한 차량을 보기 드물었습니다. 낯선 도시에 가면 이른 아침 새벽시장이나 밤의 야시장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는데, 일단 그게 매우 어려운 것도 좀 유감이었고. 화려한 건물이 많았지만 아직 비어 있는 곳들이 많았고, 과환공원을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사람이 다닐 수 없게 막아놓은 곳도 많아서, 이번 행사를 위해 만든 구역이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약간 인천 송도와 그 송도 초창기에 인천에서 무리해서 개최했던 세계 도시축전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었는데, 그걸 수많은 공안과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정말 이동 자체를 통제해 놓아서 거대한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양면테이프 등을 사기 위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편의점도 문구점도 없어서, 컨시어지에 물어보고 한참 떨어져 있는 가게로 걸어가는데, 가는 길목에 행사장에서 꽤 떨어진 곳인데도 그쪽 길목을 통으로 막아놓고 출입증을 걸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지나가게 하지 않는 모습이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가 그 골목 바로 안쪽을 가리키면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는데도 빙 돌아가라고 막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이래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어요. 한국의 2000년대 초 까지의 관제 행사들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들이 많았는데, 관제 행사 특유의 무리하고 고압적인 부분에 과할 정도의 자본과 인력과 기술을 쓸어넣으니 이런 형태가 되는구나 싶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윈댐에 머무르는 작가님께 듣기로는, 시내에서 이 지역의 분양 안내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어쩐지 안도했음.)
여튼 남의 돈으로 행사에 참가한다는 건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을 하러 가는 것이고, 당연히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이것저것 일했습니다. 저와 해도연 작가님은 한국 SF를 알리는 부스를 신청했는데, 이번에 과학소설 작가연대 이름으로 나간 것은 아니지만 SF 작가 상당수가 작가연대 소속이라 자료집을 비치했고, 개인적으로 가져간 책들도 볼 수 있도록 진열했습니다. 월드콘 부스 리본과 스티커, 한국과환 뱃지 등을 준비해서 나눠주었고, 연대원 외의 작가님들에 대한 문의가 있을 때는 책을 낸 출판사 홈페이지나 소속 에이전시(사실 에이전시 가입하신 분들은 그린북 아니면 블라썸이 대부분이니까 두 곳이죠) 연락처를 알려드리기도 했어요. 화이트보드를 준비해서, 그날 이벤트가 있는 작가님의 이름과 시간을 적어놓기도 했고요. 매일매일 일어난 일이나 행사 하면서 알게 된 노하우 같은 것을 작가연대 게시판에 올릴 수 있도록 그때그때 메모해 두기도 했습니다.
아, 저 화이트보드에 적힌 글씨는 저나 해도연 작가님의 글씨가 아닙니다. 이번 행사 동안 우리 한국 팀을 돌봐주신 어시스턴트, 안천 선생님의 글씨예요. 안천 선생님은 한국어과 학생으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부터 우리가 출국할 때 때 까지, 행사기간 내내 일정이 계속 바뀌거나, 돌발 상황이 생기는 가운데 저희를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분입니다.
부스에서 다른 대학 부스나 팬진 부스에서 오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리본을 교환하고, 한국 SF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티벳 SF 팀을 찾아가 우리 리본과 뱃지를 드렸더니 티벳에서는 해도연 작가님께 선물로 커다란 티벳 직물 스카프를 감아 주고 가시기도 했습니다. 닥터후 소설들이 중국에는 다 번역되어 있었고요. 전시장 쪽에서는 역시 삼체와 관련된 부스들이 규모가 컸고, 과환세계 부스도 흥미로웠습니다. 사실은, 막상 중국에 와 보니 류츠신은 부럽지 않은데, 과환세계는 미치도록 부러웠어요. 류츠신 훌륭한 작가고 저도 삼체 정말 좋아하지만, 한국에도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있고, 창작의 세계란 “플루토”의 튤립처럼 하나의 절대적인 답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백화난만의 세계니까. 하지만 40년 이상 SF 독자들을 키워 온 SF 잡지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18일 저녁때는 청두 월드콘 개막식, 19일 오전에는 청두 국제 SF대회 개막식과 청두 티안푸 SF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습니다. 김보영, 김초엽 작가님의 일행으로 각종 행사를 1, 2열에서 보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18일에는 김보영 작가님의 사천왕 관련 강연과 김초엽 작가님의 대담이 있었고, 19일에는 김보영 작가님의 사천왕 강연과 저의 “삼국지가 한국, 일본 SF에 끼친 영향”에 대한 주제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발표 이후 우리 부스에 찾아와서, 삼국지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국이나 일본의 여성 SF 팬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아시아 여자들은 다들 삼국지를 사랑하는데, 아시아 남자들만 그걸 모르죠.”하고 삼덕의 공감대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협력하여 SF 작품 교류를 했던 미래사무관리국(未来事务管理局)쪽에서도 강의를 보러 오셨고, 미래국 웨이보에 현장 사진과 코멘트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19일 밤, 은하상 시상식에 참석했습니다.
김초엽 작가님이 쓰고 이시아 번역가님이 번역하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최우수 번역가상을 받았고, 김초엽 작가님은 최우수 외국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장에서 트위터로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고, 저와 해도연 작가님이 현장 사진과 현장 분위기를 바로 과학소설 작가연대로 보내서, 정보라 작가님이 은하상 시상식이 끝나기도 전에 각 언론에 보도자료를 보내셨습니다. 사실 저는 누가 상 받았다고 그러면 부럽다, 이 배신자야 ㅋㅋㅋㅋ 하는 쪽이었지만, 김초엽 작가님이 이렇게 큰 상을 받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니 그냥 기쁘고 감동적이었어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닌지 해도연 작가님은 조금 울먹울먹 하시기도 했습니다. 끝나고 김초엽 작가님이 호텔 로비에서 맥주를 한턱 내셔서 늦게까지 놀았어요. 더 놀 수도 있지만 20일에도 일정들이 있습니다.
20일에는 김초엽 작가님 기사가 신문에 크게 실렸습니다. 이시아 선생님이 가져다 주셨어요.
해도연 작가님은 한국 SF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원래 한시간을 배정받아야 했지만 일정이 꼬여서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다른 비영어권 외국인 패널들과 함께 비영어권 국가 사람의 월드콘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김초엽 작가님도 인터뷰와 사인회로 바빴고요. 그밖에도 시간이 날 때 마다 부스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작가들을 홍보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가져간 뱃지와 리본 등은 동이 났고요. 스티커와, 다른 나라 작가들과 만나 교류할 때 쓸 약간만이 남았습니다. 저희는 이 시점에서 부스에 한국 작가 안내 전시물들만 남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했어요. 나눠 줄 굿즈가 일단 거의 다 떨어졌으니까요. 마침 이날 밤에는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진수이 강 나이트 투어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진수이 강은 제 소설 “파촉, 삼만 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 강이에요. 여섯 시에 호텔에서 출발하는 일정이었는데, 조금 일찍 나가서 무후사와 두보초당을 본 뒤, 진수이 강으로 일곱 시까지 가서 합류해도 된다고 하여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남의 돈으로 가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지만, 솔직히 저희는 여기 와서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웃음)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투어 다녀온 자랑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생각하고….. 저와 김보영, 김초엽, 해도연 작가님은 진수이강에서 다른 외국 작가님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현지 로컬 맥주인 판다 맥주와 양꼬치를 먹었습니다. 옆에 앉아 계시던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82년생 김지영을 알고 계셔서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적인 부분은 김지영이 평균적이거나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상위권이라는 게 아니냐, 이 소설은 리얼리즘 그 자체다, 하고 열성적으로 이야기했고, 뱃지 등을 교환하기도 했어요. 이날 같이 투어를 다녔던 분 중에는 휴고상 단편 에디터 상에 노미네이트 된 셰리 토마스(Sheree Renée Thomas)도 있었어요. 세계적인 행사에 왔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여기저기에 그야말로 책이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존잘님”들이 가득하다는 것이겠죠. 아침 먹으러 내려갔더니 로버트 제임스 소여가 있고, 로비에서 김보영 작가님이 닐 클라크와 마주쳐서 반가워하는.
이날 밤, 이시아 번역가님이 우리를 위해 파티를 열어 주신다며 과일을 잔뜩 사들고 오셔서, 김초엽 작가님 방에서 새벽에 모였습니다. 정확히는 21일 새벽이네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김준녕 작가님과도 친해져서 과학소설작가연대 회원가입을 권유드렸어요. 새벽에 김보영 작가님께서는 먼저 귀국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는 다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사실 해도연 작가님이 주최측의 실수로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해져서 한국 SF 소개를 너무 짧게 추려서 하셨기 때문에, 이날 오전에 다른 일정을 잡아서 진행하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어요. 부스를 철거하고, 여기 초대된 사람들에게 다들 대호평인 판다 투어를 잠깐 다녀왔다가, 이시아 번역가님을 비롯하여 중국 번역가님들의 대담을 보러 갔습니다. 자막도 통역기도 없어서 각자 앱으로 중국어 인식을 해서 실시간 번역을 하거나, 클로버노트로 받아적어서 한번에 번역기에 넣는 식으로 강의를 들었어요. 그리고 이시아 번역가님을 통해 과학소설작가연대에서 만든 자료집과, 저희가 부스에 비치하려고 가져갔던 책들을 과환세계에 전달했습니다.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저희는, 일도 많이 했고 너무 많이 뛰어다녀서 정말 지쳐 있었지만, 이제 빅 이벤트인 휴고상 시상식이 있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 휴고상을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어요. 설령 작가로서 휴고상을 보러 갈 기회가 또 있을지는 몰라도, 휴고상을 앞에서 두 번째 줄에서 볼 기회는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으면 비타민과 컨디션을 털어넣고서라도 가야죠. 그리고 지켜 본 휴고상 시상식은, 가서 앉아서 현장을 경험하는 것 자체로 엄청나게 많은 공부가 되는 이벤트였습니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하게 하는 밤이었어요. 내가 작가로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야심부터, 한때는 한국 SF 팬덤 500명 소리가 정설처럼 나왔던 시기를 뻔히 보며 작가가 된 내가 우리 유니언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언젠가 규모가 큰 SF 행사를 하고 싶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경험들을 쌓아가야 할까에 대한 생각까지. 사실은 우리 작가들이 더 많이 잘 되고, 상도 받고, 그래서 더 많은 작가들이 본인이 상을 받든, 함께 갈 기회가 생기든, 더 많은 것들을 볼 기회가 오기를 바라게 되었어요. 한두 사람에게 경험치를 몰아주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다양한 경험치가 쌓여서 언젠가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
…….생각하는 건 좋은데, 휴고상 로컬행사 아니잖아. 중국쪽 인사가 상을 발표하거나 수상소감을 말하는데, 영어 자막이라도 어디 좀 띄워주면 안 되냐…… 아니, 수상소감은 대본이 없어서 어렵다 해도, 적어도 중국이 자랑하는 류츠신 선생의 말은 좀 자막 깔아줬어야지…… 물론, 영어로 수상소감 발표하는 것에 중국어 자막도 안 붙였으니까, 너도 나도 공평하게 못 알아듣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국제 행사인데 그런 부분에서 집중이 깨지는 문제가 좀 있긴 했어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 현장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꿈을 꾸게 합니다. 그런 행사였던 것 같아요.
아직 만화잡지 “이슈”가 있었고 그 “이슈”에 “레이디 디텍티브”를 연재하던 때니까 십 년도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아, 저도 언젠가는 남의 돈으로 프랑스 가 보고 싶어요.(만화가로 성공해서 앙굴렘에 초청받고 싶다는 소리였습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가가 되고 성공하면 그런게 가능할까요?”하고 농담을 했을 때, 우리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형태로든 작가로서 다른 나라의 행사에 가 보면 다른 것이 많이 보일 거라고(+그리고 공짜 너무 밝히지 말라고), 그게 뭔지 좀 알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휴고상 시상식이 끝난 뒤, 동아시아 허블에서 “우리 사장님이 내시는 겁니다 ㅋㅋ”하며 법카로 사준 쌀국수를 먹고, 잠깐 눈 붙였다가 22일 새벽에 호텔을 나섰습니다. 청두를 떠나 티안푸로, 남쪽으로 향하며 제갈공명이 맹획을 치러 가던 길이 혹시 이쪽 길이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티안푸 공항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저와 해도연 작가님은 다시 셰리 토마스와 만나 인사했습니다. 인천을 경유해서 간다고요. 그렇게 닷새간의 출장이 끝났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린이들에게 판다 인형 한 마리씩 안겨주고, 신전떡볶이를 포장해다가 먹고, 그리고 곯아떨어졌어요. 그 사이 청두에서는 김준녕 작가님의 강연과, 김초엽 작가님의 서점 사인회가 있었겠지요. 폐막식도 있고요. 저녁때 일어나 행사기간 내내 활발하던 채팅방에서 다른 작가님들과 메일주소나 SNS 주소를 공유하고, 인사를 남겼습니다. 끝.
PS) 근데 청두까지 가서, 향신료 못 사오고 차 못 사온 건 좀 아쉬워요. 근데 그런 건 시장을 돌아다닐 틈이 있었어야……. 아니다, 요즘 타오바오 직구 잘 되고, 그렇지 않아도 육보차 같은 건 직구로 사먹고 있지. 그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