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

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 –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이상희, 추수밭

읽으면서 처음에는 맞는 말 같은데 가면 갈 수록 “이 1세계 작가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라는 말이 나오는 책. 예전에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읽다가 느꼈던 불쾌감이 되돌아왔는데, 그 책을 읽고 불쾌했던 게 내가 어려서였는지, 독일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 책을 다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본질적으로 작가는 변하지 않았고, “지금 나는 이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알고 있지!” 하며 부유함을 선망하는 작가의 꽤나 위선적인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사람이 그런 것을 정말로 많이 내려놓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그 “몰락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작가 소개에 굳이굳이굳이 언급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읽은 게 내가 경인교대 옆의 가로 2미터 세로 4미터짜리 원룸에서 살던 때의 일이었는데,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실 나는 몰락한 귀족인데”인 이야기를 하는 작가라니 좀 싫다. 한국 작가가 “사실 나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고 한국전쟁 전에는 우리집에 금송아지가……”하고 이야기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면 그보다 꼴사나운 일이 어디 있다고.

위대한 정치 이념들은 예외 없이 인간 중심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복을 중심에 놓는다. 녹색 사고는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전제에서 출발한 유일한 정치 이데올로기다.

물론 맞는 말도 꽤 있다. 우리는 지구에 피해를 주고 있고,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데, 지구를 살리기 위한 일들 중 상당부분은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것이라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 쉽고, 또 유행과 집단압력이 작용하면서 수많은 헛소리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 티셔츠 한 장을 만드는데 물 5천리터가 소비되고, 의류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데 이산화탄소 23킬로그램이 만들어진다, 양말을 살 때마다 북극 얼음 한 조각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으로 10분 정도 동영상을 보면 2,000와트짜리 전기오븐을 5분간 최대출력으로 가열하는 만큼의 전기가 소비되며, 구글 검색 한 번에 0.2그램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전세계적으로 1분당 760톤의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이 수치가 정확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반성하고, 해외여행이 중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는 일갈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작가는 “우아하고 고상하며 귀족적인” 것들에 대해 또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승마는 다르다. 생태 친화적 스포츠를 거론할 때 승마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일정한 집착이 속물적으로 보이지 않는 유일한 스포츠가 바로 승마일 것이다. 말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hippomania(히포마니아) 유독 자연 친화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소박한 성향을 띠고 일반적으로 까다롭지 않으면서 엉뚱한 면도 숨어 있는, 그래서 더욱더 호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신랄하기로 악명 높은 영국의 앤 공주 옆에서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던 비결도 그 자리에서 오로지 승마에 관한 수다만 떨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생화를 보며 느끼는 즐거움도 기후 위기 시대에는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며, 초를 태우는 사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적어도 지역 양봉가에게서 초를 사라고 말하면서, 비행기 여행이 백만장자나 가능할 만큼 비싸져야 한다, 운동복이나 핫팬츠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장미꽃병이 놓인 빳빳한 흰색 식탁보 앞에서 머리를 올린 푸른 유니폼의 승무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던 팬암 여객기 시절로 돌아가는 게 시급한 기후보호 조치가 아닐까, 하는 식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뭘까,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은 끝없이, 신분의 개념이 사라지거나 희석된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 것은 부유한 상류층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이 사람은 끝없이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지갑이 얇은 사람들이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비웃으며 “현대의 부자들은 사치를 포기하는 것을 사치의 정점으로 여긴다.”거나, 패시브 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하다 말고 “물론 최고의 선택은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절대적인 신분의 상징이 된 ‘살아 있는 벽과 지붕 Living Walls and Roofs’이다.”라고, 갑자기 요즘 부자들의 호사스러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거나.

지금의 우리가, 기업이 해야 하지만 비용이 들기 때문에 손 놓고 있는 것들, 정부가 마땅히 나서야 하지만 눈치만 보고 있는 것들을 비난하고, 실질적으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끝없이 부자들은 요즘 이러고 사는데, 소리만 하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신분제가 없어지고, 사람들의 구매력이 늘어나고, 그래서 전에는 승용차나 휴가 같은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사람들까지 다들 누리고 살아서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그 바람에 1세계 사람들이, 상류층들이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물론 그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부유층의 유행도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 부분에 방점을 찍고 보기에는 너무나, 부유층 선망이 눈에 보이는 글이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발언을 징징거림으로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치기어린 부분이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당장 전지구적인 정책을 수립할 권력은 없지만 바로 그 결과인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세대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냥 1세계와 상류층을 조금이라도 비난한다고 느껴지면 견딜 수 없는 게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실컷 하면서 쓰레기 분리수거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기만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지. 그나저나 기후위기가 심각해진 이후에도, 지구에 상류층이라든가 귀족이라는 게 남아있긴 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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