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블루스카이에서 키르난님이 사이토 치호가 휘야전(輝夜伝)이라는 시대극 만화를 그리고 있다고 놀라셔서, 그 전에 토리카에바야(とりかえ・ばや)도 그렸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토리카에바야를 예전에 다른 작가가 그린 만화가 뭐였죠 하고 이야기가 흘러갔다. 어쩐지 “내겐 너무 멋진 그대” 그림체였는데 싶어서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야마우치 나오미의 “더 체인지”였다. 해적판 제목은 “체인지”인데 정발은 되지 않았다. 이거 정발되면 재미있을텐데 하도 생각하다가, 야마우치 나오미가 2018년에 그린 시대물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읽었다. 역시 헤이안 시대, 10세기 말의 일본 이야기인 오치쿠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만화다.
오치쿠보는 “움푹 패인” 이라는 뜻으로, 주인공인 아씨가 기거하는, 다른 자매들의 침소와 멀리 떨어진 움푹 패이고 초라한 골방을 뜻한다. “신데렐라”라는 제목이 재투성이라는 뜻인 것 처럼, 주인공의 계모이자 아버지의 정실인 키타노카타는 주인공을 학대하고 초라하게 만든 뒤 그 초라한 모습을 조롱하는 이름으로 부른다. 츄나곤의 부인인 키타노카타는 자신이 아들을 임신했을 때 남편인 츄나곤이 황실의 후손인 아름다운 여성과 관계를 맺어 딸을 낳자 원망했고, 그 여성이 젊어서 세상을 떠난 뒤 츄나곤이 딸을 데려오자 매우 미워하며, 가지고 온 어머니의 유품을 하나하나 빼앗고, 아가씨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며, 골방에 처박아 둔 채 바느질만 시킨다. 그렇게 오치쿠보라 불리게 된 아씨는 생모를 닮아 아름답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낫지만,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키타노카타에게 학대당하며 무척이나 자존감이 낮은 아가씨로 자랐다. 한편 아씨의 유모의 딸인 아코기는 아씨를 지켜주기 위해 함께 츄나곤의 집으로 왔지만, 키타노카타는 아코기를 자신의 셋째딸인 산노기미의 시녀로 삼는다.
산노기미는 오치쿠보 아씨가 바느질한 아름답고 섬세한 옷으로 남편인 쿠로도노쇼쇼의 사랑을 받는다. 아씨는 밤낮없이 바느질을 하고, 아코기는 그런 아씨를 보며 속상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쿠로도노쇼쇼의 부하인 코레나리와 사랑에 빠진다. 아코기는 아씨가 좋은 집안 출신의 훌륭한 남편을 만나 결혼해야만 키타노카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며 코레나리에게 의논하고, 코레나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키운 고귀한 도련님, 후지와라노 미치요리에게 아씨를 소개한다.
코레나리의 젖형제이자 우콘노쇼쇼인 미치요리는 신분, 용모, 능력 모두 빠질 것 없는 완벽한 도련님이자 바람둥이로, 히카루 겐지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이다. 코레나리에게 아씨의 이야기를 들은 쇼쇼는 몇 번이나 연문을 보내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다가, 츄나곤 일가가 참배를 떠나 집을 비운 사이 집에 숨어들어 아씨와 만난다. 아씨는 자신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에 서러워하지만, 쇼쇼는 품위있고 아름다운 아씨를 사랑하게 되고, 처음에는 신분은 높지만 바람둥이라고 쇼쇼를 경계하던 아코기도 친척에게 병풍이나 식기, 세면도구 같은, 원래 갖고 있었지만 키타노카타에게 전부 빼앗겼던 생활용품들을 부탁해 아씨의 신방을 꾸민다. 사흘 밤 동안 만나며 아씨와 쇼쇼는 사랑에 빠지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결혼의 떡을 나누어 먹는다.
하지만 집을 비운 사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키타노카타는 아씨가 혼인해 집을 떠나면 바느질을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고, 집에 빌붙어 있는 늙은 호색한인 친척 텐야쿠노스케를 아씨와 결혼시키려 한다. 사흘동안, 아씨는 쇼쇼가 건네준 빗을 품고 의지하며 버텨내고 마침내 쇼쇼는 코레나리와 아코기의 도움을 받아 아씨를 구출한다. 쇼쇼는 니죠의 저택에 아씨를 데려가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 코레나리와 아코기도 혼인한다.
한편 쇼쇼의 유모가 츄나곤의 넷째딸과 혼담을 주고받는데, 아씨가 쇼쇼의 부인이 된 줄 모르는 키타노카타는 명문가와의 혼담을 놓칠 수 없어, 쇼쇼가 승낙하지 않았는데도 혼인을 강행하려 든다. 쇼쇼는 서책을 좋아하지만 말을 닮은 인상이라 여성에게 인기가 없는 사촌 효부노쇼(모토노리)를 결혼의 뜻을 거절할 사자로 보낸다. 원래는 츄나곤의 넷째딸(시노기미)가 망신을 당했던 것 같은데, 만화에서는 말을 좋아하는 시노기미가 효부노쇼에게 반해 혼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효부노쇼를 사위로 맞았다는 이유로 츄나곤은 망신을 당하고, 산노기미의 남편인 쿠로도노쇼쇼도 부끄러워하여 산노기미를 찾지 않게 된다.) 하지만 어디로 보아도 빼어난 우콘노쇼쇼를 사위로 맞을 생각을 하던 키타노카타는 앓아눕고 만다.
이후에도 쇼쇼는 소소한 복수를 이어간다. 키타노카타의 참배길에 수레가 부서지게 하고, 츄나곤 댁 시녀(뇨보)들을 하나하나 자기 집으로 빼돌리며, 키타노카타가 하려는 일을 계속 방해한다. 츄나곤은 명문가의 아들로 전도양양한 쇼쇼에게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하지만, 키타노카타는 쇼쇼가 건방지다고 분노하고, 나아가 오치쿠보(아씨)가 집에서 사라진 뒤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씨의 어머니가 아씨에게 상속한 산조의 저택을, 이제 딸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화려하게 보수공사를 하고 이사할 계획을 세운다. 어머니의 집을 빼앗기가 된 아씨는 낡은 옷에 꿰매어 놓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물려준 집문서를 꺼내고 쇼쇼는 츄나곤 댁 이사 날에 그 집문서를 들고 나타나 집을 빼앗어 버린다. 분통이 터진 키타노카타 앞에, 쇼쇼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은 아씨가 나타나고, 아씨는 아버지인 츄나곤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
표면적으로 아씨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은 아버지의 정실인 키타노카타다. 그는 마치 콩쥐팥쥐나 신데렐라의 계모처럼 의붓딸을 학대한다. 하지만 키타노카타는 이들과 달리, 츄나곤과 먼저 혼인했고, 정실이 사용하는 북쪽 안채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아씨의 어머니가 황족 출신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키타노카타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이 임신한 사이 츄나곤과 정을 통한 여성일 뿐이다. 그리고 아씨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츄나곤은 딸을 데려와 정실인 키타노카타에게 키우게 한다. 이 당시 혼인을 하거나 입궁을 하는 것은 모두 후견인이 될 어머니와 아버지가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하는 일이었으니, 츄나곤은 키타노카타가 딸을 적당히 잘 키워 시집보내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사실 당시로서는 당연했고 츄나곤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을 “여러 부인과 첩을 두는 풍습” 자체가 모든 문제의 근원인 셈이다. 작가는 헤이안 시대의 고전을 만화화하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색을 한다. 츄나곤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 일이 키타노카타만의 문제가 아님을 밝힌다. 계모에게 구박받으며 자존감이 있는대로 바닥난데다 규방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아씨를, 답답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이자, ‘바느질 오타쿠’로 묘사해 독자와 눈높이를 맞춘다. 고전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포인트를 집어넣은 부분들이, 이 이야기를 낡아빠진 10세기 고전이 아니라 현재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든다.
그나저나 야마우치 나오미의 “더 체인지”든, 사이토 치호의 “토리카에바야”든, 토리카에바야를 원작으로 하는 만화도 좀 정발되어 주면 좋겠는데. 실은 이전에 토리카에바야를 모티브로 소설을 써보려고 했다가, 사이토 치호의 “토리카에바야” 표지와 홍보 이미지를 보고 깔끔하게 손 들어 버렸다. SF로 만들든 스릴러로 만들든 무슨 짓을 해도 저 색기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