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중의 “온”으로 오염된 세계, 온을 정화할 수 있는 용이 인간들에게 살해당해 도시연합의 여덟 도시와 그를 연결하는 철도를 이루고, 용의 비늘은 중요한 자원이기도 한 동조자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데 사용되는 시대에, 도시연합군의 전리품이자 동조율 100%인 동조자로, 시민권 없이 무기 취급받던 소녀 유은우는 군에서 쫓겨나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하루하루 무사히 살아남기에도 벅찬 유은우는 완벽한 학생이자 생환률 100%로 모두에게 신뢰받는 리더 서재희와, 도시연합군 출신의 편입생으로 자신을 미워하는 정윤환, 그리고 도시연합장인 차인호의 외동딸이자 서재희의 약혼자이며 학생회장인 차예원과 얽히며 해묵은 예언, “낙원의 이론”에 휩쓸려간다.
“낙원의 이론”은 도시연합을 지탱하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위험인자”들을 미리 찾아내어 제거하는 데 사용된다. 초반에는 마치 도시연합을 지탱하는 전설처럼 보이는 “낙원의 이론”의 세 기둥은, 사실은 중앙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동조자, 중앙학교 입학을 허가받을 수 있는 엘리트이자 미래의 사회지도층이며, 함께 힘을 합쳐 “낙원의 이론”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반역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낙원의 이론” 의 세 기둥과 이 통제된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엘리트는 종이 한 장 차이나 다름없기에 도시연합은 전설의 세 사람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관리하고 포섭한다. 한편 다음 세대의 엘리트들이자 현 사회지도층의 자제들을 중앙학교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임유현은, “낙원의 이론”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솎아내듯이 살해하며 학생들의 목숨을 인질삼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임유현은 차별받는 8도시 출신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서재희를 손에 넣기 위해 마을을 폭격하고 부모님의 목숨을 인질삼아 그를 학교로 데려오고, “낙원의 이론”의 세 기둥 중 하나로 삼는 한편,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고문과 세뇌로 길들이고, 권력자인 차인호의 딸이자 가짜 기둥인 차예원과 약혼시킨다. 자신이 “낙원의 이론”의 한 기둥이라면, 정말로 이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은 서재희. 그의 앞에 유은우가 나타나며, 변화는 시작된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차인호와 같습니다. 그가 딸만 보는 것처럼 저도 한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 사람이 시민의 편에 설 사람이라, 저도 그렇게 하는 것 뿐입니다.”
SF판타지로맨스 웹소설인 “낙원의 이론”의 기본적인 구도는, SF 순정만화를 많이 보던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하다. 재난으로 인해 통제된 사회, 학원 도시, 학원 도시의 학생회장이 학교 밖의 세계에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것, 판타지에 종종 등장하는 “마나”에, 대기를 오염시킨다는 설정을 추가한 “온”과 “온”을 정화할 수 있는 용, 용의 죽음 위에 세워진 도시는 마법과 신비를 박살내고 그 위에 기계문명을 세운 인류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한때 구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은 현실과 타협하고 더러는 타락한 어른들과, 그에 맞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청년들의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장차 기득권이 될 중앙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형제들과 친구들이 “낙원의 이론” 시스템에 의해 살해당해 왔으며, 그것은 자신의 차례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시연합에 맞서 일어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엄선된 엘리트, 예비 기득권, 희생자의 가족 또는 친구, 그리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익숙한 이야기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촛불혁명이라는, 우리가 겪었던 역사와 겹쳐지며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 작품이 계약을 맺고 출간된 것은 2018년이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이 “조아라”에 연재되었던 것은 2016년 9월부터 2017년 12월까지였다. 마치 우리가 당연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노래로 불렀을 때, 그 당연한 이야기가 하나의 모토가 되었듯이, 동조자인 중앙학교 학생들이 온갖 행사에서 당연하게 읽고 외우는 “동조자는 도시연합의 평화와 시민의 행복에 기여한다, 비동조자와 화합하고 약자를 위해 헌신한다, 타고난 재능을 악의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는 동조자 헌장은 피투성이가 된 서재희가 마이크를 쥐고 말하고 학생들이 인쇄하여 뿌리며 강렬한 구호가 된다.
“우리는 도시연합과 정면 대결한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여태 은폐되어 온 악행에 대한 명백한 해명과 낙원의 이론 시스템 파괴, 그리고 관계자들에 대한 적법한 처벌.”
하지만 이 이야기는, 혁명의 메타포를 갖고 있지만 “시민 혁명”이 아닌 엘리트 혁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민 출신이었던 서재희는 임유현의 후원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류층의 애티튜드를 타고난듯이 흡수했고, 총사령관 김서혁이 낙원의 이론의 또 다른 기둥으로 지목했던 정윤환은 친부모는 의사와 배우, 큰아버지이자 현재의 아버지는 유력 정치인인 부유하고 권력에 가까이 위치한 상류층 출신으로, 온을 설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인물이다. 주인공인 유은우는 또 어떤가. 동조율 100%, 용의 심장을 품고 있는 이 남다른 주인공에게는 인권이 없다고 하지만 그는 인권 없음을 역으로 살려 제약을 무시하는 데 쓴다. 그의 아버지는 동조자이자 반란군 수장이고, 어머니는 천재 과학자였다.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는 주변 등장인물들도 사실은 전부 중앙학교 출신 엘리트들이다. 이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기간은 한 학기가 채 되지 못하고, 특히 서재희의 반역에서 유은우가 용과 조우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고작 며칠에 불과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린 엘리트들의 주장에 사람들은 빠르게 동조하고, 혁명은 꿈처럼 성공한다. 그리고 그 혁명 뒤에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일단은 혁명의 주체들이 아직 어린 청년들인 탓도 있지만, 김서혁 사령관이다. 혁명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나이브하고, 사실은 정권교체일 뿐이지 않은가, 조금 더 나아가 군부가 엘리트를 등에 업고 벌인 쿠데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대목이다. 사실 김서혁과 손을 잡은 데 부터 시작해서 비판의 여지가 많지만, SF 순정만화의 연장선에 서 있는 이 소설은 이 부분을 매우 순정만화적인 해법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한다.
바로 장렬하게 망한 사랑이다. (……)
김서혁은 백지와 같은 상태인 자신의 전리품을 사랑하고 신뢰한다. 그가 낙원의 이론이 말하는 또 다른 기둥이라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에 뜻을 두지 않았던 그는, 그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닫는다. 그의 사랑은 그가 보이는 불합리한 행동들을 납득시킨다. 한편 또 다른 기둥인 정윤환 역시 마찬가지다. 정윤환에게 있어 자신의 죽은 형이 구하려 했던 유은우는 부서진 꿈의 잔재와도 같다. 연민이고, 사랑이고, 유은우 옆에서만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신뢰와 의지 앞에서, 낙원의 이론의 세 사람이라는 운명적인 얽힘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그리고 심지어 메인 인물은 아니지만 메인 빌런으로 기능하고도 남았을 도시연합장 차인호 역시, 딸인 차예원에게서 죽은 아내를 보고 그를 신념으로 삼아 움직이며 망한 선택을 하는 바람에 역으로 이들의 혁명에 좋든 싫든 도움이 되어버린다. 이들의 절절하게 망한 사랑이 훌륭한 SF이지만 정치나 혁명물로는 불합리한 부분들 채워내며, 이야기는 아귀가 맞게 돌아간다.
두려웠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을 외면하는 선택은 더 두려웠다. 모른 척 살아남는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 것인가.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정말 좋아하면서도, SF 소설이라기보다는 SF 순정만화가 텍스트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텍스트를 벗겨내고 만화의 형태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당시 작업하던 웹툰 작업이 끝나면 출판사나 작가님께 문의라도 드려보고 싶었지만….. 내가 하던 작업이 끝났을 무렵에 이미 이 소설은 웹툰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고싶은 작품이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일단 문의부터 하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웹툰을 보면서 때때로 아쉽고, 때때로 질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