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작할 때 이 이야기는 실존 인물, 단체와 관련이 없다고 강력하게 외치는 작품이야말로 현실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 책도, 펼치자마자 허구라고 외치는 문장이 보인다.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등은 작가가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허구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곧 깨닫게 된다. 여기 나오는 사건들 대부분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부지런히 사쓰마와리를 도는 사회부 경찰팀 소속 막내 기자 송가을은, 가난한 한부모 가정 엄마가 아이의 첫돌을 앞두고 한복을 훔친 이야기나, 술에 취해 빼빼로를 훔친 중년 남자의 이야기같은 작고 사소해보이는 사건에서 시작해서, 경력이 쌓이고 사회부의 꽃이라는 법조팀, 탐사보도팀으로 옮겨가며 더 많은 사건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냉동창고 화재사고로 노동자들이 죽는 참사를 취재하며 죽음은 열심히 일하던 사람에게 먼저 손을 뻗는 것을 절감하고, 고양이를 이용해 어린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꾀어 강간하고 살해해 놓고는 “우발적 범죄”라고 주장하는 백귀동과, 사형제 폐지의 필요성을 오랜 시간 보도해 온 고도일보의 기조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총리 동생이 거액의 공천헌금을 받은 사건을 밝혀내 1톱을 쓰고,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스마트 저축은행” 사건을 극적으로 밝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홍등가를 취재하러 갔다가 남자친구가 성매수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비참한 기분으로 이별하고, 범죄를 저지른 중학생들이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며 어린 친구들에게 용서와 이해를 제공하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들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들을 알고 경악하기도 하며, 송가을은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 속에서 단단한 기자로 성장한다.
여성 기자가 남초 사회인 언론사에서 기자로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안노 모요코의 “워킹맨”과 비교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지만, 워킹맨이 각각의 사건들보다는 “일하는 여성”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여성이 기자로서 일하는 것은 이미 당연(물론 차별은 여기저기 숨쉬듯 존재한다)한 시대에, “여성 기자”가 아닌 “기자”로서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형태다.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 독립된 옴니버스 구성이지만, 이 과정에서 사자에상 시공같은 일 없이, 송가을은 착실히 담당 경찰서를 옮기고, 부서를 옮기고, 성장한다. 초심을 잃는 수많은 현실 속의 사람들과 달리, 송가을은 ‘죄송한 게 너무 많은 세상에서 좀 덜 죄송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겠다.’는 초심을 비교적 유지하며 7년동안 많은 경험을 쌓아간다. 그것은 더 좋은 기자가 되는 길이자, 좋은 인간이 되는 길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과 성숙의 반대편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아집을 부리는 적폐들이 있다.
“저기 기자님. 시대가 바뀌어도요. 대한민국 검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사건을 다룬에 옴니버스물이고, 검사와 법조계가 절대적 악당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부산고검장이 스폰서에게 롤스로이스를 받은 것을 밝혀내고, 38년 전 독재정권 시절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거짓으로 죄를 자백한 강팔성이 과거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과거사 재심에 나섰을 때, 강경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부인하고, 과거 고문했던 수사관들을 법정에 세우기를 거부하며 다시 피해자에게 죄를 구형하려 드는 검사들의 모습은 실로 추악하게 다루어진다. 과거사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어도 항소하고, 2심에서 또 무죄가 나면 상고해서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아내겠다면서, “끝까지 싸우는 게 검사”라고 주장하는 부장검사나, 국회의원 고규범 사건에 유죄를 받아내어야 부장검사 승진을 할 수 있다며 아주 명운을 걸고 덤비는 검사 김경준은, 요즘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사 최종 목표는 유죄 판결”이라고 떠들며 법을 곡학아세하여 사람을 죽이려 들면서 자기 스스로를 “칼잡이”니, “조선 제일검”운운하는 자아도취적인 검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경찰팀에서의 송가을이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고, 법조팀에서의 송가을의 활극에 가까운 맹활약이 감히 손대기 어려운 성역처럼 취급받는 검사과 법조계를 향해 날카로운 펜끝으로 작은 돌팔매라도 던져보려 하는 언론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면(물론 현실 언론이 이렇게 제 기능을 다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탐사보도팀에서의 송가을은 글로벌하고 멋진 아이템을 발굴하겠다는 의욕에서 시작해, 우리 사회의 아프로 고통스러운 단면들을 찾아가는 기자로 성숙해간다. 북한에서 도망쳐 태국에서 난민 심사를 받다가, 미국에서 받아주어 그곳에 정착한, 미국인들보다 같은 동포라는 한국인들에게 더 차별받는 탈북 남성의 사연은 “미국에 살고 있는 탈북민”이라는 생각지 못한 부분을 곱씹어 생각하게 해 오래 여운이 남았다. 일본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의 자녀들인 노인들을 모시고 일본의 탄광마을로 떠나는 탐사보도 이야기에서 우토로 마을을 떠올리다가, 이 행사를 주관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끌어안고 노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고통스러운 리얼리즘이라고 한탄했다. 북한 여공의 중국 외화벌이 취재담은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뒤 동남아보다 더 싸면서 일솜씨 야무진 노동력을 찾아 중국에 공장을 차려 북한 노동자들을 고용한 한국인 사장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그 세월호의 이야기다.
“네모호”가 침몰하던 그 시각, 청담동 미용실을 예약했던 애널리스트 설영진은 자신이 예약한 원장님이 VIP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가는 모습을 본다. 청와대에 자주 드나들며 매번 대통령의 머리 모양을 전과 똑같이 유지하고 있다는 원장과, 배가 가라앉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 머리를 하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의문은 2년 뒤, 비선 실세 취재와 “네모호” 침몰 2주기를 함께 취재하던 고도일보 취재팀의 귀에 들어간다. 그때 영진이 미용실 다녀오고 만나기로 했던, 배우인 친구 민정은 그 순간에 뉴스를 보고, 영진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고, 국회의원 보좌관 역을 맡고 역할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국회경력 15년 이상인 홍순표 의원 보좌관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날 당일에 대통령이 시간을 빡빡하게 보낸 게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단서를 얻은 송가을은 민정을 찾아간다.
2년 전 그날 미처 손질되지 못한 설영진의 머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손질됐을 누군가의 머리도 떠올랐다.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던 당근 케이크도 생생했다.
블랙리스트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 정의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 이렇게 그날의 답답함을 모두가 안고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민정과 영진은 고도일보에 그날의 일을 증언한다. 해당 기사는 고도일보 1면 톱으로 올라가고,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고, 탄핵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거창하게 세상을 뒤엎겠다, 내가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마음이 아닌, 세상에 덜 죄송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로운 마음을 품은 젊은 여성이 7년동안 커리어를 쌓으며, 초심을 잃지 않고 성장해 간다. 현실의 고도일보, 즉 한겨레가 늘 정의로운 것도 아니며, 때로는 민정당을 한번 쳤으면 민주당도 한번 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계적인 균형을 이루려다 헛발질을 하는 일도 종종 보이지만, 기자가 기레기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적어도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신문사에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적어도 조선일보에 들어가는 사람보다는 의로운 마음이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송가을은 그런, 신입 기자가 가질 수 있는 의로운 마음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실수와 해프닝들을 안고 중견으로 성장해가는 사람이다. 현실보다 많이 미화가 되었을 거라고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데스크도 되고, 국장도 되는 미래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