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룬도라스 공작 저택의 문이 열렸다.
더는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아닌, 그리고 위스테리아 후작에게 실망하여 그 가문의 이름도 거부한, 기사 가문의 손녀인 바이올렛 에버윙은 나의 친구이자, 공작부인의 친구의 딸로서 이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가 헬리오스 공작부인임을 아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갔던 시녀, 조안 뿐이다. 조안은 원래 어머니의 시녀들 중 한 명으로,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온갖 예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사교계에 나간 뒤로는 내 신변을 돕고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사소한 정황들을 파악하여 어머니께 보고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만, 당분간은 예법 선생을 겸해서 바이올렛의 신변을 돌보기로 했다.
“조안이라고 부르십시오.”
“잘 부탁해요, 조안.”
“얼마간이나마 공작부인이셨으니까, 아랫사람을 부리시는 방법은 아시겠지요? 저는 이제부터 아가씨를 보좌하기 위해 여기 와 있는 거랍니다. 아가씨께서 장차 수녀가 되시더라도, 친아버지께 돌아가시더라도, 혹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시더라도, 서룬도라스 공작가에서 한동안 지내다 나가신 이상 공작 영애 못지 않은 숙녀가 되셔야 하니까요.”
“으응…”
“그러면 어디까지 배우셨는지, 잠시 말씀을 들어볼까요.”
바이올렛은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역사나 철학, 문학, 신화, 미술, 어느 분야에서도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피아노와 하프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사교계에 나선 어느 아가씨 못지 않은 교양을 쌓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몇 가지, 매우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헬리오스 공작이,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가르친 부분들이었다. 하루종일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거나, 여자의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것이 좋다거나, 몸에 체모가 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까 전부 뽑아내야 한다거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안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하다못해 히카루 겐지는 어린 와카무라사키를 납치해다가, 후지츠보 중궁처럼 이상적인 여성으로 키우려고나 했지. 이건 남의 집 귀한 딸을 납치해서 자기 성벽이나 강요하고, 자기 전용의 성노예로 만들려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뻔뻔한 새끼 같으니.
“아가씨는 지금부터, 식사량도 조금씩 늘리셔야 합니다. 낮에는 얼굴이 그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햇살을 쪼이고 산책을 하세요. 밤에는 잠도 푹 주무시고요. 평소에, 잠은 얼마나 주무셨나요.”
“솔직히 얼마나 잤다고 딱 잘라서 말을 할 수가 없어. 헬리오스 공작이 새벽에라도 들어오시면 이야기 상대를 해 드려야 했으니까…”
“결혼하신 뒤에요?”
“결혼 전에도, 그러니까 오빠 집에 처음 갔을 때 부터 줄곧…”
“그러면 열 살때부터, 밤에 잠도 못 자게 했단 말이에요?”
내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이건 명백한 아동학대다. 아니, 그 새끼가 지금까지 바이올렛에게 한 짓 치고 아동학대나 성폭력이 아닌 게 얼마나 있겠느냐만.
“그게… 그때는 헬리오스 공작을 오빠처럼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이야기를 들어주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대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서…”
“주로 여자 이야기였죠.”
“…”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꼭, 질투하지 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21세기 기준으로는 정말, 구제불능적인 가스라이팅이었다.
“…한때는 그런 말을 믿은 적도 있었지만요.”
바이올렛 헬리오스, 아니, 바이올렛 에버윙은 미소지었다.
조안이 바이올렛을 평가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사이,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이 드레스를 보렴, 다이애나.”
어머니는 바이올렛이 ‘공작부인으로서’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들여다보며 혀를 차셨다.
“이 드레스는 네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거야, 15년에서 20년쯤 된 옷이구나. 그리고 여기,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황실의 문장이 자수 띠로 들어가 있어. 이런 걸 숨은 자수로 놓는 것은 황실 가족들의 전속 재봉사들 솜씨란다.”
“…자기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힌 걸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낫겠지. 하지만 로즈마리 블랑쉬는 공식 정부일 뿐, 황실의 일원이 아니야. 폐하께서 하사하셨다면 모를까.”
“그럼 대체…”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히카루 겐지가 사랑한 사람은 아버지 기리츠보 덴노의 부인인 후지츠보 중궁이었다. 기리츠보 덴노의 여러 아내들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이는 우대신의 딸인 홍휘전 여어였지만, 기리츠보 덴노는 겐지의 어머니인 기리츠보 갱의가 세상을 떠난 뒤, 기리츠보 갱의와 닮았으며 전 덴노의 딸인 내친왕을 비로 맞아들여 후지츠보 여어로 삼았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 시절의 아내이자 첫 아들을 낳아주었던 황태자비가 세상을 떠나고, 즉위한 뒤 가장 사랑한 여성이자 헬리오스의 어머니인 로즈마리 블랑쉬를 공식 정부로 삼았다. 그리고 황실의 먼 친척인 에르도스 공작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포이닉스 황태자는 바로 그 두 번째 황후 폐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후 폐하이자, 나의 큰언니가 되는 분은 세 번째…
“황후 폐하의 드레스인가요?”
어느 황후인지는 사실 나도 모르겠다. 지금도 황후전을 노리고 있다는 걸 보면 지금의 황후 폐하일 수도, 드레스가 15년쯤 된 것이고, 바이올렛이 전 황후와는 사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 황후 폐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헬리오스 공작은, 황후 폐하를 사모한 거예요? 자기 어머니를?”
“목소리를 낮추거라, 다이애나.”
미치겠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헬리오스가 손을 댔던 수녀원장도, 전 황후 폐하와 무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난 이 드레스를 본 적이 있단다. 당시의 황후 폐하께서 즐겨 입으시던 거야.”
“하지만… 하지만.”
“일단 지금의 황후 폐하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느냐. 폐하께서 아셨다면, 헬리오스와 황후 폐하의 관계를 의심하셨을 수도 있는 일이니.”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어머니.”
입이 바싹 말라 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 어머니께서도 아시겠지만 전 황후 폐하는 헬리오스가 네 살 때에야 폐하와 혼인하셨어요.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나기는 해요.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이 그동안 추문을 일으킨 상대들을 생각해 보렴. 열두 살 차이가 대수인지.”
“그건 그렇네요. 전 황후 폐하의 언니인 수녀원장님과도 밀회를 했으니까.”
“나머지 하나는 뭐지?”
“…헬리오스 공작이 황후 궁에 침입하려 했던 것을, 레이디 블루벨이 막아낸 이야기예요.”
“뭐라고.”
어머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숙한 숙녀가 골똘히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저는 헬리오스 공작의 난행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어요.”
“어떤 것을 말이냐.”
“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러는가.”
어머니는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어머니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헬리오스가 저를 노리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자는 수많은 여자들을 노리는 가운데, 전 황후 폐하의 언니인 수녀원장님의 명예를 더럽혔고, 전 황후 폐하의 사촌동생이 되는 바이올렛을 유괴, 납치, 강간한데다, 현 황후 폐하의 침소에 숨어들려고 했고, 전 황태자비 전하를 강간하고 임신시켰어요. 그 인간은 황제 폐하나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와 혼인관계에 있는 분과 그 자매들을 노리고 있는데, 황후 폐하의 동생이자 현 황태자인 포이닉스 전하와 약혼하게 될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죠.”
“그래서 그 이유는.”
“황실의 핏줄을 더럽히기 위해서죠. 아, 여기서 더럽힌다는 건 여자의 정조 문제가 아니에요. 그는 황실의 일원이 된 여자들을 임신시키려 하고 있어요. 아마도 그 사람들이 낳는 아이가 계승권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 가장 클 거고, 아니면 장차 자신의 자손 중에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어서일 수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다음 목표는 아마도…”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을!”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말씀은 나의 예측과 일치한다. 헬리오스 공작이 단순한 색정광이 아닌 야심가라면 계승권을 가진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을 유혹하고 임신시켜, 자신의 계승권을 확보하려 들 수도 있다.
“황태자 전하께도, 제 추측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우리의 약혼식에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이 참석하실 때, 우리 서룬도라스 가문에서 모시고 보호하였으면 좋겠다고 뜻을 아뢰었지요.”
“그분은 황족이시니 황실에서 모시는 게 옳겠지만…”
“황궁 안에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과연 황제 폐하께서 헬리오스의 일을 공론화 해 주실까요?”
그럴 리 없다.
이렇게 그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지금도,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생겨선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황실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가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기우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어머니께서는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을 키우신 분이시지요. 아델라이드 님께서 수녀원에 들어가시며 두 분께서 정답게 말씀 나누실 기회도 많지 않았을 텐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곧, 공작가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정말 여러 면에서 번거로운 분이시네요, 영애께서는.”
레이디 블루벨이 서룬도라스 공작가에 방문한 것은,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이 도착하시기로 예정된 날 아침이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말씀드렸더니, 이런 식으로 일을 꾸미셨나요?”
“일을 꾸미다뇨. 그냥 더 이상은 그 남자에게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것 뿐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헬리오스 공작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로 유명해지셨던데요.”
“어머나, 소문을 들으셨군요. 황후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할 뿐이랍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소식을 듣고 모처럼 기껍게 웃으셨답니다. 황후 폐하의 동생 되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한다면서요.”
블루벨은 미소를 지었다. 시녀들이 보기에 우리는 기 싸움을 하는 듯 보였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약간 ‘기싸움하는 영애’ 역할놀이를 하듯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누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았다. 어쩌면 우리는 꽤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헬리오스 공작을 확실하게 혼내주고 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