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무도회가 끝나고, 헬리오스 공작가의 마차는 공작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밖에는 기회가 없을 거야.”
어머니는, 창문 밖으로 눈을 맞고 서 있는 공작가의 마차를 흘끔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공작부인을 혼자 내보낸 것은, 이 무도회가 공작부인에게는 ‘결혼 후 첫 번째 친정 나들이’이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했을 걸. 남자라는 족속들이 대체로 그렇지.”
“오빠만… 헬리오스 공작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바이올렛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우리 집 시녀인 조안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안으로 위장하고 우리 집으로 도망치는 길이었다.
조안은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하녀복을 한 벌 빌려 입고, 손에는 드레스 상자를 상자를 든 채로 마차에 탔다. 후작부인은 바이올렛이 도망치는 데 동의했다. 후작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딸의 행복과 헬리오스 공작을 사위로 맞았을 때의 이득,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의 분노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상관없다. 자식이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헬리오스 공작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 따위.
그는 바이올렛이 우리 집으로 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이 적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후작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바이올렛은 무사히 그의 손에서 벗어날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가 이 사실을 바로 헬리오스에게 알린다 한들, 그리고 헬리오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아 단숨에 말을 몰아 달려올 수 있다 한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뒤져 볼 만큼 간이 크진 않을 것이다. 며칠 전처럼 나 혼자 타고 있다면 모를까, 어머니가 타고 계신 마차를 잡아 세울 리 없다. 무엇보다도 아직 무도회는 끝나지 않았고,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공식적으로 친정 나들이를 온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며칠 느긋하게 묵어가도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보통은 결혼하고 한 달 안에 오는 친정 나들이지만, 헬리오스에게 양심이 있다면 알 것이다. 자신이 4년 넘게 이 소녀를 자기 저택에 가둬 둔 채, 친아버지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위스테리아 후작도 알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을 다시 호랑이 아가리에 던져넣을 수는 없다는 것을.
뭐, 그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
“남자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소유하고 구속하고 억압하는 걸 사랑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이 나이가 되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과연 남자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할 줄 알던가?”
“엇, 하지만 아버지는…”
“네 아버지는 다소 이런저런 결점은 있지만, 성실하고 양심이 있는 사람인 거지.”
어머니는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네 아버지는 방계 출신인 자신이 서룬도라스 공작이 되는 대신, 이 집안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바로 나이고, 나에게 신실과 성의를 다 하기로 약속했지. 그는 서룬도라스 공작으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고, 나와 내 자손들을 위해 공작가의 번영을 이루는 데 평생을 다 바친 사람이야. 글쎄다, 그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일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가 네 아버지를 고를 때는 사랑보다는 사람이 성실한가, 양심적인가, 능력이 있는가, 그런 걸 보긴 했지.”
그러니까 어머니의 말씀을 21세기적으로 생각한다면, 서룬도라스 공작가는 일종의 재벌그룹이다. 그 가문의 외동딸인 어머니는 재벌가의 상속자이자 현 오너이고. 사실 어머니는 서룬도라스 공작이 되고도 남을 만한 능력자였지만, 지금은 여성이 공작이 되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누군가 공작위를 물려받을 남자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방계 중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났던 아버지를, 일종의 전문 경영인으로서 영입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도.
“…나름 행복하시죠?”
“그러니까 자식을 여섯이나 낳지 않았겠니.”
“사랑하시는 게 맞네요.”
“꼭 사랑해야 아이가 생기는 건 아니란다, 이 아가씨야.”
“우리가 합스부르크 왕가도 아니고,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게 아니라면 필요한 만큼만 만드는 것도 방법이지요. 특히 어머니처럼, 아이를 낳는 쪽이 실질적인 가주인 경우에는요.”
“하긴, 그것도 그렇겠구나.”
“…아쉽진 않으셨어요?”
“글쎄다. 기왕이면 네 아버지의 핏줄 중에 다음 번이나 다음 다음 번의 공작이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딸들만 태어난 일에 대해, 잠시 이 시대 사람다운 질문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낳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딸들 중 누군가를, 양자로 들인 클라우스와 혼인시켜 어머니처럼, 공작부인이 실권을 쥐는 형태로 만들고 싶으셨겠지. 다만 그러기에는, 앞서 다섯 딸들의 혼처가 전부 대단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딸들을 어딘가의 황후, 왕비, 왕자비, 공비 등으로 줄줄이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누구 한 사람에게만 너는 집을 떠나지 말고, 머리에 누군가가 얹어 주는 영광의 보관을 얹지 말고, 이 서룬도라스 공작가를 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저, 부인…”
그때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화려하고 성숙해 보이는 드레스를 벗고, 다소 수수한 조안의 옷을 입은 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무척 아름다운 소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수수한 옷차림이, 이제 고작 열네 살인 바이올렛에게는 더 잘 어울렸다. 지난 두 번의 무도회보다, 이 마차에의 모습이 더 사랑스럽고 솔직해 보였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부인.”
그 아름다운 바이올렛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제 친아버지인 위스테리아 후작 각하는, 헬리오스 공작의 그간의 일을 듣고도 그를 고발할 생각은 하지 못하셨지요. 어쩌면 그는, 헬리오스 공작에게 제가 어디로 갔는지 그대로 털어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공작부인께서도 고초를 겪으시지 않을지…”
“우리 아가씨가 똑똑하긴 한데, 아직은 겉똑똑이네.”
어머니가 소리내어 웃었다.
“위스테리아 후작이라면야, 헬리오스 공작의 위세를 이기지 못하고 딸을 내놓는다는 선택도 할 수 있겠지. 어쩌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딸 덕분에 헬리오스 공작과 사돈이 된 것이 기쁠 수도 있고.”
“아아…”
“하지만 우리 서룬도라스 가문은, 이 나라 최고의 귀족 가문이란다. 헬리오스 공작이 제 사병을 이끌고 내 저택 앞에서 농성을 하더라도, 해산시켜버릴 정도의 힘은 있어요.”
“하지만… 걸핏하면 자신이 폐하의 아드님이라고 말하곤 했는데요.”
“폐하의 사생아이지.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잘 알고, 폐하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의 난행을 어느정도 눈 감아주고 있단다. 하지만 신하로 격하되어 별도의 작위를 받은 상황에서, 자기 입으로 자기가 폐하의 아드님이라 떠들며 위세를 부린다면 그 역시 반역인데. 헬리오스 공작이 아직 젊어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건가?”
“아…”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이 폐하의 아드님이라면, 이쪽에는 황후 폐하가 계시지. 아무리 헬리오스 공작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나라 국모의 친정어머니께 막 대할 수는 없어요. 미스 에버윙, 당신은 내 날개 아래에 있는 한 안전해요. 헬리오스 공작이 약이라도 먹고 확 돌아버린 게 아닌 이상, 우리 서룬도라스 가문에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이올렛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되어 대답했다.
“그 헬리오스 공작이 덤벼들었다고 다리를 부러뜨린 여자는, 이 나라에 나 말고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 하지만 아마 내가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면, 헬리오스 공작은 추근거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란다.”
“물론 어머니를 당할 수야 없지요.”
“들었겠지요? 우리집에서 가장 연약한 아이도 공작의 한쪽 다리 정도는 부러뜨릴 수 있어요. 공작이 제정신이라면, 당신을 끌고가기 위해 내 집에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내가 있는 한 절대로.”
“감사합니다, 부인.”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까 공작부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소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남자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한 지금, 어떤 귀부인보다도 빛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수녀원에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부지런하고 무엇이든 잘 배우는 편이니, 부인께 폐가 되지 않도록 무엇이든 잘 해내겠습니다.”
“수녀원에 들어갈 때는 들어가더라도, 일단은 내 집에서 좀 쉬도록 해요. 어디보자, 일단 그 코르셋부터 어떻게 하고.”
“코르셋이요?”
바이올렛은 제 허리를 손끝으로 쓸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코르셋은… 왜요?”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슬쩍 봤는데, 코르셋을 이런 자리에서만 착용하는 게 아니라, 늘 입고 있는 거죠? 그렇게 바싹 졸라매서?”
“아, 예… 하지만 정숙한 아가씨는 코르셋을…”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예?”
“그 헬리오스 공작이나, 공작에게 나쁜 물이 든 시녀들이 말했겠지. 물론 사교계에 나간 아가씨들은 코르셋을 바짝 졸라매야 할 겁니다. 남편감을 구하려면 있는 허리도 졸라매고, 없는 가슴은 영혼까지 긁어모아서 있는 척을 해야지. 하지만 미스 에버윙은 지금, 아직 한참 자랄 나이잖아요?”
“…그런가요!”
“심지어는 사교계에 나간 내 딸, 다이애나도 하루종일 코르셋을 바짝 졸라매고 지내진 않느답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그렇게 한 줌도 안 되는 허리를 만들려면 하루종일 그 상태였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런데다 아까 보니 갈비뼈가 아예 휘어버렸더군요. 설마 잘 때도, 쉴 때도 그 상태였던 것은 아니겠죠?”
바이올렛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헬리오스 공작이, 그야말로 멀쩡한 사람 하나를, 자기 취향에 맞는 인형으로 만들어서 갖고 놀려고 했던 모양이군.”
“어머니, 말씀이 너무….”
“한참 자랄 나이의 아이를 저렇게 하루종일 졸라 매 놓았는데. 아니, 그 인간의 하는 짓으로 보면, 아마도 열 살 때 자기 저택에 데려갔을 때부터 저 상태였겠지. 그러면 사람 몸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뼈는 휘어버리고, 내장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나중에 아이가 생기더라도 낳다가 여자가 죽겠지. 미스 에버윙, 나는 딸을 여섯이나 키운 어머니랍니다. 당신 나이에는 식사를 더 잘 해야 하고, 코르셋은 고래수염나 철사가 아니라 천으로 된 가벼운 걸 입어야 하고, 쉴 때는 코르셋을 늦추어 놓아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