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 이야기”의 세계에서, 히카루 겐지가 노린 여자는 어떻게든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만다. 여행 중 나쁜 방위를 피하려고 그 지역의 지방관의 집에서 하루를 묵어가다가, 지방관의 젊고 아름다운 후처와 억지로 관계를 갖거나 하는 것 정도는 그에게는 예삿일이며, 의붓어머니가 친정에 가서 머무르는 동안 방에 숨어들고, 친구의 딸이자 예전에 인연이 있던 여자의 딸에게 구애를 하는, 어지간한 윤리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행하지 않을 만한 일들을 태연히 해낸다.
말하자면 그는 착실하고 근면한 강간범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쁜 일은, 히카루 겐지가 나름 잘생기고, 풍류로 유명하고, 신분이 높기 때문에, 그와 강제로 하룻밤을 보낸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도,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훗날의 독자들까지 강간 피해자라고 바로바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여성들을 제 노리개처럼 여기던 히카루 겐지가 유일하게 손에 넣지 못한 여성이 있었다.
사촌 누님인 아사가오였다.
“…그 분을 만나고 싶어요.”
나는 간곡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 저는 이 혼인을 하기 전에, 먼저 헬리오스의 행각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그가 더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황태자비가 될 사람으로서, 저의 미래와, 우리 가문의 미래와,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요.”
“…정말,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아이인 줄 몰랐는데.”
황후께서는 고개를 저었지만, 웃고 계셨다.
“그분에 대해서는 어머니께 이야기를 듣도록 하렴. 아델라이드 공주가 아직 어린 아기였을 때, 어머니께서 그분의 양육을 맡으셨으니까 말이다.”
***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 말이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이야기하고,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에 대해 물었다. 나의 어머니,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그 헬리오스 공작의 무도회에 다녀온 이후로 조금 이상한 데 관심을 쏟는 것 같구나.”
“그런가요…?”
“설마 헬리오스 공작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줄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플보다 악플이라고 했나. 이런 식으로 그에 대해, 그의 악행들을 쫓아다니는 일도 관심이라면 관심인 걸까. 이 세계에서 나의 위치가 그 ‘오보로즈키요’에 해당하기에, 그런 말에는 더 신경이 쓰였다.
“다만 헬리오스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헬리오스 공작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황태자 전하께 누가 될 것 같았어요. 황후 폐하께는 그 일에 대해 상담을 드렸던 거고요.”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일들을 알아본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너는 지금 약혼을 앞두고 있는 몸이니, 평소보다 더 몸가짐을 조심해야겠지?”
“예, 어머니.”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를 티타임에 초대하셨단다. 네가 황후 폐하를 뵈러 갔으니, 황후 궁으로 가서 담소 나누시라고 권해드렸다만, 사양하시더구나. 사가에서는 자매간인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눈치없이 끼어들어서야 되겠느냐며.”
“어머나…”
“나이는 아직 젊지만 신중하고, 황후 폐하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늘 정중하시지. 그분이 황태자 전하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 결혼이 무척 만족스러웠을 것 같구나.”
그것도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포이닉스 전하가 황태자가 아니라 여러 황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면, 아버지는 이 약혼에 수년간 공을 들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포이닉스 전하가 황자가 아닌 일반 귀족이었다면, 아버지는 이쪽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는 그 점을 생각하며 낮게 소리죽여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 말인데.”
“아, 그렇죠.”
“그렇죠는 무슨, 네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으면서.”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하나도 급할 게 없는 이야기라는 듯 느긋하게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그분은 수녀원장이지만, 속세를 아주 떠나신 것은 아니란다. 황실 사람들은 늘 그렇지. 만약,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포이닉스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분은 바로 환속하실 거다. 그리고 방계들 중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와 혼인하시겠지.”
“그러면 그분이 다음 황제가 되시는 건가요?”
“그분은 여대공이 되시고, 훗날 그분 소생의 황자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시지.”
“왜 직접 황제가 되지 못하고…”
“여성으로 대를 잇지 못하니까, 그런 식으로 편법을 쓰는 거란다. 몇 번인가 역사적으로 그런사례가 있었어. 황녀를 환속시켜 여대공으로 삼아 방계 황족과 혼인하게 한 뒤, 그 소생을 다음 황제로 세운 예가.”
어머니는 내가 몰랐던 옛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말씀하시다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여대공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생각이 났단다. 그분도 네 약혼식에 오시거든.”
***
아사가오노미야는 덴노의 손녀로, 그의 아버지는 기리츠보 덴노의 동생이자 히카루 겐지의 숙부인 식부경 친왕이었다. 히카루 겐지는 학식이 높고 고상한 이 사촌 누님을 소년 시절부터 흠모하여, 십대 때부터 서른 살이 넘을 때 까지 계속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남성이 관례를 치르면 가까운 사촌이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이들 사촌간의 교류는 사실상 편지와 와카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사가오는 자신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오는 겐지를, 나름 꾸준하고 성실한 사람, 그리고 와카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 바른 편지로 구혼해 오는,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사촌동생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사가오의 출신이 고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현대의 독자는 안다. 지방관의 부인인 우쓰세미를 강간하던 것과 달리, 그는 아사가오나 미야스도코로 같은 황족들에게 접근만큼은 정중하게 했다. 나는 그를 근면 성실한 강간범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도 사람을 봐 가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히카루 겐지는 아사가오에게 구혼을 한 적도 있었다. 히카루 겐지가 아사가오에게 계속 연문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세상에도 어느정도 소문이 난 데다, 아오이노우에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 무렵 겐지의 부인인 무라사키노우에가 이조원의 여주인이자, 육조원 봄 저택의 주인으로 불리며 겐지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 중 가장 확고부동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무라사키노우에는 정식으로 혼례의 과정을 밟아 혼인한 정실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병부경의 딸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고, 아사가오보다는 격이 낮았다. 사람들은 아사가오라면 인격도, 가문도 히카루 겐지의 정실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아사가오의 부친인 식부경도 겐지를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사가오는 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양이 높은 귀부인이던 미야스도코로도, 겐지를 사랑하게 되며 질투와 번뇌로 방황하며 고통받고, 그 명예를 어느정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은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히카루 겐지의 정실 부인으로 존중받으며 화려한 삶을 누리는 것은 당시의 여자들이 누구라도 부러워 할 만한 축복받은 삶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겐지가 사랑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질투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인 식부경 친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고모이자 기리츠보 덴노의 누이동생인 온나고노미야와 함께 살고, 가모 신사의 재원을 지낸 뒤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아무리 덴노의 손녀인 여왕이라고 해도, 아버지나 남편, 다른 남자 형제가 없는 상태로 혼자 살아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었지만, 그는 끝내 겐지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도, 겐지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떤 여자들을 모아놓고 함께 살던 육조원에 의탁하는 일도 없이 홀로 고고하게 살아갔다.
무라사키노우에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일 일이었다. 신분 높은 아사가오가 겐지와 혼인하면, 사실상의 무라사키노우에는 졸지에 여러 첩들 중 한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겐지는 아오이노우에게 세상을 떠난 뒤 무라사키노우에를 공식적인 정실로써 법도에 따라 맞아들인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가 그를 겐지의 아내로 알고 있어도 그의 지위는 늘 불안했다. 훗날 겐지가 조카인 온나산노미야와 혼인했하자, 무라사키노우에는 정말로 그 지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바이올렛 헬리오스의 경우는 어떨까.
그 역시, 비슷한 길을 가게 될까.
소매가 바닥까지 끌릴 만큼 긴, 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레이스 잠옷을 입은 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왜, 헬리오스 공작 그 한 놈 때문에 이 모든 시련과 번뇌와 고초를 겪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대체 왜, 내가 쓴 논문 속에 들어와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걸까.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 비하면, 논문의 고통 정도는 어떻게든 견뎌 나갈 수 있는 법이다. 우선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포이닉스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헬리오스 공작에 대해 대책을 세워 보자. 그리고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주에 대해서도, 만나는 것은 약혼식 날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우선 편지만이라도 보내 보고.
그리고…
“아니, 아가씨. 소매는 왜 그렇게 접고 계신 거예요.”
“레이스가 땅에 끌려서.”
이놈의 부담스러운 옷차림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을 하게 된다.
학회에서 받은 티셔츠나 SPA에서 1+1로 파는 바지 같은 거나 입고 다니던 대학원생은, 갑자기 호화로운 드레스도 모자라서 잠옷까지 이렇게 공들여 만든 물건을 입고 있자니 정말 부담스럽다.
그런데다 잘 때 입느라 구겨지고 침 흘리고 할 잠옷 같은 것을 만드는데, 이렇게까지 노동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게 어쩐지 죄송하고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고.
“그게 지금 요즘 유행하는 건데요.”
“알아. 하지만 소매 길이를 좀 줄이면 안 되나? 한 이정도로…”
“아가씨, 그런 건 가난한 귀족 영애들이나 입는 거예요. 공작 영애 정도 되셨으면 좀 참으셔야죠. 아가씨가 그러시면, 아무도 이해 못 해요. 저같은 하녀도 어떻게 레이스를 한 마 사다가 아끼는 블루머에 달고 그러는데…”
…잔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역시 이건, 황태자비 쯤 되어서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