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그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문학을 공부하고, “겐지 이야기”로 논문까지 쓰면서, 이 망할 히카루 겐지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나였다.
그런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아니, 잠깐.
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오히려 정말로 히카루 겐지다운 짓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쪽 세계에서는 과부가 된 형수를 강간한 거지만, 원작에서는 무려 아버지의 아내, 그것도 어머니를 닮은 의붓어머니를 강간해서 아들을 낳게 했던 놈인데.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사람같지도 않은 놈, 법의 철퇴에 뒤통수가 깨져도 시원치 않은 개망나니가, 고전 소설의 주인공이랍시고 우아한 풍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것이, 나는 무척이나 속이 쓰렸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더…
“클로틸트 비 전하의 가련하고 기박한 일도 그렇지만… 비 전하는 두 나라 동맹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셨잖요.”
“…그러셨지요. 헬리오스 공작은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런 분을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헬리오스 공작이라는 작자는 제 욕망만 채우면 나라의 앞날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런 인간이죠.”
레이디 블루벨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듣기에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헬리오스 공작은 시를 지었다고 하더군요.”
“…뭘 해요?”
“여자들은 모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린다고. 자기 자신을 가련히 여기는 시를 썼다고요.”
아아.
나는 피가 다 식다 못해 몸에서 싹 빠져나가는 듯이 어지러웠다.
그래, 그래. 히카루 겐지는 시문에 능했지. 그래서 “겐지 이야기”에는, 정말 연구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만큼의 와카가 잔뜩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헤이안 시대는 여자를 유혹할 때에도 시를 보내고, 여자와 잠자리를 한 뒤에도 시를 보내며, 시를 받은 여자는 자기도 재치있는 시를 지어 답장을 보내야 하는 세계였으니까. 히카루 겐지가 누군가에게 마수를 뻗을 때 마다, “겐지 이야기”의 본문에서는 이런저런 와카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헤이안 시대 귀족들은 참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고.
읽다 보니 때때로 아름답다고 느꼈으며.
논문을 쓸 때는 인생의 걸림돌같던 그 시들이었는데.
“…대체 문학하는 남자란 뭘까요.”
이제 알겠다. 히카루 겐지가 썼던 그 시라는 것들에 대해.
시를 아무리 잘 쓰면 뭘 해.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를 골라서, 순식간에 형식을 맞춰 뱉어내면 뭘 해. 사람을 강간하고도 사랑이라고 미화하고, 사람을 죽여놓고도 여자들은 자신을 외롭게 만들 뿐이라며 한탄하며, 그저 세상에 불쌍한 건 자기 자신밖에 없고, 뭐라도 조금만 상처받으면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엄마를 찾다 못해,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줄 계모는 강간하고,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들에게서는 그 어머니의 모습을 계속 찾는 한심한 새끼가.
“…그야말로 개 찌질한 새끼가, SNS에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척 써놓는 글이랑 다를 게 없잖아.”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여기서 21세기에 쓰던 말을 쓰면 안 되겠지. 나는 다시 몸가짐을 바로 하고 품위있는 공작가 막내 영애다운 태도로 레이디 블루벨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은, 그런 작자가 황족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 하나 뿐이네요. 그런 사람에게 계승권까지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었겠죠.”
“그랬으면 헬리오스 공작은, 제 욕망만 채울 수 있으면 나라도 팔아먹었을 것 같은걸요.”
“…”
“말이 심했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레이디 블루벨에게는 약혼자였던 분이었는데.”
“…하마터면.”
레이디 블루벨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그는 제 걸음에 발맞추듯 한 마디, 한 마디씩 말을 이어갔다.
“그 동맹, 정말 깨질 수도 있었어요.”
“…”
“짐작하실 거예요. 클로틸드 전하께서는 모국에서도 소중한 공주님이셨고, 그분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왕국에 계셨으니까. 전쟁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죠.”
“그런데…”
“그분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황태자비 전하셨어요.”
“예…?”
“클로틸드 전하께서는, 다른 연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는 편지를 남기셨어요. 그 마지막 편지의 말미에서 비 전하께서는 두 나라의 동맹과 평화를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아…”
“그 편지마저 없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죠. 물론… 전란이 발발한다고 해도 우리가 지진 않았겠지만, 전쟁은 더 크고 강한 나라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니까.”
“정말로… 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신 분이셨군요.”
“비 전하와 공주님의 무덤은 국경을 넘기 전, 마지막 언덕 위에 조성되었어요. 레이디 다이애나가 조금 전 말씀하신 그대로, 두 나라의 미래를 함께 지켜 보시라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황궁의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어요.”
여기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헬리오스의 일이 끝까지 자신과 어린 딸의 목줄을 틀어 쥘 것이다. 뱃속의 아이를 핑계로, 다시 나타나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다.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이 구는 저 사생아가,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나는 절박하게, 레이디 블루벨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한 가지만 더,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헬리오스 공작은, 설마 황후 폐하께도…”
“시도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맹세코 없었어요.”
레이디 블루벨이 천천히 돌아섰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의 황후 폐하께서, 헬리오스 공작과의 독대를 피하기 위해 늘 십여 명의 시녀들을 동반하고, 헬리오스 공작은 황후 궁에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헬리오스 공작과 친분이 있는 남성 귀족은 황후 궁 근처에 오지도 못하도록 겹겹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면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다. 그에게 있어, 언니는 이복형의 모후인 “고키덴 여어”가 아니라, 아버지의 새로운 부인인 “후지츠보 여어”에 가까웠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시도를 했지요.”
“정말로 황후 폐하를 노렸다는 거군요…”
“노렸다 뿐일까요. 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황후 폐하의 침소에서 숙직을 하곤 했답니다. 한번은 정말로 그 자가, 폐하의 침소에서 숙직하던 제 앞에 나타나기도 했었답니다. 정말 우스운 순간이었습니다.”
“우습다고요?”
말하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서늘한 목소리였다. 서늘한 눈빛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 듯이 차가웠다. 그의, 레이디 블루벨의 상처입은 마음은 그대로 차갑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미 제 사람이다 싶은 여자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사라져서, 정작 약혼녀인 제 앞에는 침실은 고사하고, 무도회에서도 마주치려 들지 않던 자가, 황후 폐하의 침소에 숨어들었다가 저와 마주치다니요.”
이건 질투가 아니라. 헬리오스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농담으로라도, 그가 유혹하고 탐한 수많은 여자들처럼, 그에게 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 처음으로 레이디 블루벨의 앞에서 당황했을 헬리오스 공작을, 그냥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레이디 블루벨.”
“…제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털어놓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눈동자 위로, 물기가 번들거렸다. 한겨울 연못 위에 얇게 얼어붙은 살얼음 아래, 일렁이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살얼음이 무너지듯, 레이디 블루벨의 햐안 뺨 위로 눈물이 투둑, 하고 떨어졌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레이디 블루벨을, 우아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한번 좌절당한 꿈 앞에서 눈물만 흘리는 대신 자신의 길을 찾고, 저열한 인간에게 물건처럼 주어지듯 약혼을 당한 것에 절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됨을 잃지 않았던 이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 레이디 블루벨은 내 어깨에 매달려 오열했다. 온 몸을 울리는 듯한 통곡이, 마침내 끓어넘치듯이 밖으로 쏟아졌다. 그래요, 더 울어요. 괜찮아요. 클로틸드 비 전하의 일은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헬리오스 공작의 음행 역시 당신이 막을 수 있었던 일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는 황후 폐하를 좋아해요.”
한참만에야, 레이디 블루벨은 목이 쉰 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황후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동생인 당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 역시도, 레이디 블루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천 년 전의 소설 주인공, 헤이안 시대의 이상적인 귀족의 모습을 그 한 몸에 갖추었다는 히카루 겐지가, 사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인간인지를. 내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범죄자로 분류될만한 인간이었지만, 천 년 전에도 제멋대로이고, 감당이 되지 않는 범죄와 난행을 풍류라는 이름으로 일삼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가 남긴 저택 육조원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무라사키노우에가 다듬고 구현해 낸, 네 계절을 아우르는 저택과 겐지의 인생을 압축한 듯한 여자들이 가득한 세계, 현실에 이룩한 극락 속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동안, 그가 겁탈했던 여자들은 치욕과 두려움, 질투와 번뇌,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는 것을.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도, 레이디 블루벨의 말씀을 유념하면서, 조심하겠어요.”
히카루 겐지, 아니 헬리오스 공작은, 자극을 추구하는 모험심 강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지루한 여자는, 자신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여자, 이미 차지해 자신의 그늘 아래 있는 여자였다. 그가 레이디 블루벨과의 혼인을 미루고, 끝내 파혼까지 하게 된 것은, 레이디 블루벨이 싫어서가 아니라 황제가 정해준 약혼자니까, 지루해서 그랬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극적인 상대,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상대다. 자신의 의붓어머니나 형수와 같은.
그렇다면 분명하다. 그 새끼의 다음 타겟은 바로 나다.
그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계승권을 갖고, 그가 결코 될 수 없는 황태자가 된, 그의 이복동생, 포이닉스 황태자와 혼인할 사람. 무엇보다도 헬리오스 공작과 나름 급이 맞는,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막내딸인 나. “겐지 이야기”에서 겐지가 오보로즈키요를 유혹하면서 그렇게 많은 욕망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마도 나 한 사람을 노림으로써 자신이 바랐던 그 많은 것들을 일거에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착각할지도 모른다.
실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