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 순간 레이디 블루벨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제가.”
“레이디 다이애나.”

그는 내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차갑고 엄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철벽 친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정말로 철벽을 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바늘 하나 밀고 들어갈 틈도 없을 듯이 나를 막아서는 듯 했다. 마치 클로틸드 비 전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묻지 말라고,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는 황실의 치부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백 마디의 거부와 만류보다도 더 더 강렬한 거부의 의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닙니다.”

나는 움츠러들었다. 레이디 블루벨은 위축된 내 표정을 보다가, 한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밤 하늘같이 검은 귀밑머리가 바람에 한 가닥 흩날렸다.

그 순간 느꼈다. 그 한 가닥 머리카락처럼, 그 순간 흐트러지며,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레이디 블루벨의 마음을.

그리고 나는, “겐지 이야기”를 생각했다. 장차 황태자비가 되리라는 드높은 자존심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신하로 강등된 겐지와 혼인하고, 제대로 행복해질 수 없었던 아오이노우에를. 그리고 겐지의 정실인 아오이를 질투하고, 아오이가 아이를 낳게 되자 끝내 생령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었던 또 다른 지체높은 여성, 미야스도코로를.

…히카루 겐지의 부친, 기리츠보 덴노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원래 동생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 동생은 오래 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태자비와 어린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태자비는 육조원이라 불리는 대저택에서 살며,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라고 불렸다. 그는 학식과 교양이 높고, 무엇보다도 시와 서도에 능통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저는 알아야 해요.”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겐지는, 자신에게는 숙모 뻘이 되는 미야스도코로를 유혹했다. 그와 시문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에 대한 소문은 덴노의 귀에까지 들어가 덴노가 근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전 황태자비라 해도, 미야스도코로는 겐지의 여러 애인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정실인 아오이노우에와 어깨를 나란히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통과 질투 속에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생령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황실의 딸로서 신궁에서 봉사를 하게 된 딸을 따라 떠났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겠습니다.”

돌아서려는 레이디 블루벨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귀에 쏟아넣듯, 물었다.

“헬리오스 공작이, 혹 클로틸드 비 전하를 유혹하려 했던 건가요.”

레이디 블루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긍정이었다. 아주 쓰디쓴 긍정.

“…정말 최악이네요, 그 사람.”
“최악은 당신이야.”

고통스럽게, 레이디 블루벨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거기까지 알 필요가 없었어요.”

마치 독약을 삼킨 듯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알아야 하는 것은…”
“알아요, 치부죠. 제가 황태자비로 있는 동안에는 정말로,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런 걸 알고 있다고 한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달가워하시지 않을 테고요. 하지만 언젠가는요!”

레이디 블루벨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드레스 자락을 구겨쥐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돌아가셨어요.”

바람 속에서, 레이디 블루벨의 목소리가 흐느끼듯 들려왔다.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로발칸 왕국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어요. 제가 궁금한 건…”
“내 말 못 알아들었나요?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로발칸 왕국으로 돌아간 것은, 미망인의 검은 베일을 뒤집어 쓴 그 검은 마차에 실려 있던 것은, 비 전하와 어린 공주 전하의 시신이었단 말입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레이디 블루벨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내게 소리쳤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나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그 무덤에 새 풀이 돋기도 전에 저 헬리오스가, 내 약혼자라는 작자가, 비 전하를 겁탈하려 들었다고!”
“겁탈…”
“예. 비 전하를 위로한다며 몇 번 찾아갔다가 어느날 술을 가져갔는데, 그 술에 약이 들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약이라니요… 설마.”
“모르셔서 묻는 건가요? 하긴, 서룬도라스 공작가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자라다가, 이제 막 사교계에 나온 순진한 아가씨라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여자가 정신을 잃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게 만드는 약 말입니다.”

그럴 리가, 모르지 않는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무려 정치인 마저도 젊은 시절 친구가 다른 여학생을 강간하기 위해 돼지 발정제를 쓴 이야기를 추억이라며 태연히 늘어놓지 않았던가.

그래, 한 가지는 분명했다.

헬리오스 공작이라는 작자는, 정말 구제불능의 인간 쓰레기라고. 그리고 아마도 “겐지 이야기”의 히카루 겐지 역시, 그와 똑같은 인간일 것이었다.

“온 세상 여자들이 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잠자리를 하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는 헬리오스 같은 자에게 조차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여자는 있는 법이죠. 클로틸드 비 전하처럼요.”

지위가 낮은 신하의 아내를 탐하고, 죽은 숙부의 아내를 탐하고, 친구의 애첩을 탐했다.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들을, 그 외모나 그 비밀을 밝혀 조롱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자신의 계모를 사모했다. 사모의 념이 끓어넘치다 못해 어쩔 수 없었다며, 친정에 머무르던 계모를 겁탈해 임신을 시키고, 태어난 아들을 덴노의 자리로 올렸다. 계모를 닮았다는 이유로 어린 무라사키노우에를 유괴하고, 계모를 닮았으리라는 기대로 조카딸인 온나산노미야를 부인으로 삼고 또 냉대했다. 정말 갱생의 가능성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구제불능의 인간이었다.

“클로틸드 비 전하는, 황태자 전하를 열렬히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부부로서의 신의가 있었고, 또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에 대한 책임감도 강하셨지요. 헬리오스 공작이 아무리 대놓고 유혹해도, 그분은 요만큼도 여지를 주지 않으셨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헬리오스 공작이 찾아왔을 때 접견을 하시면서도, 늘 시녀들을 곁에 두고, 호위를 옆방에 두셨지요.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은 언제나처럼, 그런 술과 약으로 여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고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는 비 전하는 물론 시녀들에게도 약을 먹였어요.”

다만 그는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라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빛나는 왕자님, 신하로 강등된 비운의 왕자님으로 떠받들어졌을 뿐, 그의 실상 역시 헬리오스와 크게 다를 리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 일은 아예 없었습니다. 궁중에도, 또 비 전하께도, 비 전하께서 욕을 당하시기 전에 호위가 구해냈다고 전해졌지요. 폐하께서는 헬리오스에게 근신을 명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죽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의 죄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와 짝지어졌던 이 반듯한 여성은 울고 있었다.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지만, 마치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약혼녀 대접이라고는 요만큼도 받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 자의 죄 때문에 수치스러워 죽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헬리오스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는 듯 굴었지요. 폐하께서 너 같은 놈도 사람이냐, 짐승 새끼가 아니냐며 진저리를 내실 만큼!”
“그러면 비 전하께서는…”
“두 달 뒤였어요.”

레이디 블루벨은 속삭였다.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독대를 청하더니, 두 분 폐하를 배알하여 친정인 왕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셨습니다.”

두 달이라니. 짚이는 것이 있었다.

“설마… 헬리오스의…”
“비 전하께서는 정숙한 분이셨고, 달리 그럴 만한 일이 없었으니까요.”

임신이었다.

헬리오스는 얼마 전 남편을 잃은 여성을, 자신의 형수를, 전 황태자비를 강간해 임신시킨 것이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덮이고 말았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입을 틀어막혔던 걸까.

“비 전하께서는 따님이신 공주님과 함께 왕국으로 돌아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헬리오스의 일을 문제삼겠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 나라의 동맹은 깨지고 말 테고요… 대체 헬리오스는 머리라는 게 있는 사람인가요?”
“아직 어린 아가씨인 레이디 다이애나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처벌은요. 처벌은 받았나요?”
“유배를 가긴 했지요. 폐하께서도 그때만큼은 헬리오스를 벌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동안 멀리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도 비 전하를 위해 함께 간청해 주셔서, 폐하께서는 클로틸드 비 전하를 왕국으로 돌려 보내드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처음에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을 때, 황제 폐하께서는… 비 전하께서는 아직 젊고, 또 어린 공주 전하도 계시니, 포이닉스 전하와 재혼하실 것도 고려하셨습니다. 포이닉스 전하께서 너무 어려 곤란하다면 아직 미혼이고 왕위 계승권이 있는 방계 왕손과 재혼하신 뒤, 훗날 포이닉스 전하의 아드님과 공주님을 혼인시킬 수도 있는 일이고요. 비 전하께서는 비 전하께서는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되실 분으로서 이 나라에 오신 것이니, 그렇게 이 나라에 머무르며 동맹의 상징이 되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헬리오스는 다르죠. 그는 일개 신하잖아요. 계승권이 없는…”
“그렇습니다. 헬리오스는 자신이 황후 폐하 소생의 아들들보다 더 폐하의 총애를 받는 아들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 점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지만, 타국의 입장에서 그는 일개 신하일 뿐이죠. 헬리오스는 어쩌면 자신이 황태자 전하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비 전하께서는 일개 신하에게 상상도 못한 치욕과 폭력을 당한 일이셨어요.”

그리고 클로틸드 비 전하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황후가 되기 위해 왔던 이 곳에서, 과부가 되어, 검은 베일을 덮은 검은 마차를 탄 채로.

“마차에 타실 때 까지만 해도, 비 전하도 공주 마마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기 직전, 클로틸드는 거대한 검은 관처럼 보이는 그 마차 안에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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