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레이디 다이애나, 계속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보고 계시네요.”

에르도스 공작부인이 나를 불렀다.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예,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이라니…”
“저보다도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고,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이라는데… 저렇게 혼자 내버려두어도 괜찮을까요?”

귀부인들이 머뭇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확인하듯 물었다.

“제가… 저분을 걱정하는 것은 좀 이상할가요?”

그러자 어느새 분위기를 휘어잡고 이 자리의 좌장 노릇을 하고 있던 나의 어머니,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이 말했다.

“너는 상냥한 아이지.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네가 결혼을 하면 일가가 될 사람이고. 당연히 걱정할 수 있단다.”

어머니가 한 마디 하시자, 귀부인들은 다들 한 마디씩 말을 얹었다.

“레이디 다이애나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헬리오스 공작은 공작부인을 내버려두고 저렇게 수많은 여자들과 춤을 추고 있는데…”
“게다가 헬리오스 공작의 친구들이나 가신들 중에서도 난봉꾼들이 많은 것이야 유명하지요. 혹 불량한 자들이 어린 공작부인에게 불순하게 접근했을 때, 공작부인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렇지요. 공작의 행각이야 그렇다고 치고, 공작부인이 시정잡배같은 놈들에게 좋지 못한 일을 당한다면 그 역시 사교계의 수치가 아닙니까.”
“레이디 다이애나가 생각이 깊네요. 역시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서 따님을 훌륭하게 키우셨어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공작부인의 곤경을 짐작하는 목소리들 사이로, 에르도스 공작부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공작부인은 제 친정인 위스테리아 가문 사람이랍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군요. 나는 이 아이의 데뷔를 신경쓰느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저희 집안의 방계 친척이랍니다.”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한 순간 서늘한 미소를 짓더니 더 묻지 말라는 듯, 철벽을 치는 듯한 태도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저도 레이디 다이애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답니다. 혹시라도 공작부인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제 친정 가문에도 수치가 되니까요. 다른 부인들께서 허락하신다면,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이 자리에 동석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바랐던 바다.

…“겐지 이야기”의 히로인이라 할 수 있는 무라사키노우에는, 히카루 겐지가 가장 총애한 부인이었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겐지에게 유괴당하고, 그의 이상적인 여성으로 양육되었고, 열네 살이 되자마자 겐지에게 강간당한 뒤 그의 부인이 되었다. 결혼생활 내내 겐지는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카 뻘이 되는 황녀, 온나산노미야를 정실로 삼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겐지의 가장 사랑받는 부인’이라고 믿었던 무라사키노우에를 절망하게 했다. 마지막에라도 불문에 귀의하고 싶다는 무라사키노우에의 소망은, 그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겐지의 욕심 때문에 처절히 짓밟혔다. 그는 마지막까지 슬픔을 끌어안은 채, 겐지의 ‘사실혼 관계의 부인’ 상태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겐지 이야기”의 세계인 이상,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그런 식으로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헬리오스 공작 피해자 모임’ 같은 거라고 결성하고, 헬리오스 공작을 그야말로 사교계에서 매장해서, 헤이안 시대의 귀족에서 반짝거리는 금발의 왕자님으로 다시 태어난 저 색욕마인이 더 이상 여자들을 제 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더라도, 나는 한번쯤은 헬리오스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논문을 쓰던 그 1년동안, 나는 때때로 “겐지 이야기”속 여자들의 마음에 이입해 울고 웃고 저 변덕스럽고 허리가 가벼운 남자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았다. 헤이안 시대 식으로 말하자면, 생령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일 만큼.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 보랏빛 눈동자를 한 공작부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자연스럽게, ‘친정 쪽의 친척’이 되는 헬리오스 공작부인에게 시녀를 보냈다. 하녀들이 테이블보를 갈고 새로운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 귀부인들은 나의 혼담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약혼식 준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부인들은 늘 소문에 목이 말랐다. 사교계라는 판 위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소문과 정보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들을 손 안의 놀잇감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딱 필요한 만큼, 사람들의 관심과 선망을 살 만큼만 이야기를 하고, 사실 그런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세한 것은 그때,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군요.”

애초에 오늘,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무리들이 노리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황태자와 혼담이 오가고, 데뷔 직후 약혼 날짜가 잡힌 영애. 그들이 보기에 나는, 자신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이끌려다니는 대신 위험한 공은 어머니에게 넘기고,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새로운 타겟으로 내미는 만만치 않은 아가씨였을 것이다. 그런데다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신경쓰는 언행은, 누가 보기에도 ‘흠 잡을 곳 없는, 동정심까지 갖춘 영애’ 그 자체였을 테고.
나쁘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라면, 저 보랏빛 눈동자의 공작부인 역시 결코 만만하게 이들의 먹잇감이 되진 않을 사람이었다.

무라사키노우에라는 사람은, 그 어린 나이에 겐지의 부인이 되고, 곧 이조원의 여주인으로 불렸다. 겐지가 스마로 귀양을 가자 그는 겐지의 집과 재산을 능숙하게 관리했고, 겐지가 덴노 못지 않은 영화를 누렸을 때는 그의 대저택인 육조원을 이상적인 불국토의 형상으로 가꾸었다. 그는 불행했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겐지에게 발목을 잡히지만 않았아도,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작부인 역시, 그랬다.

“바이올렛 헬리오스입니다.”

그는 아직 체구가 작고 얼굴에는 어린 티가 남아 있었지만,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 모인 어떤 부인들보다도 호화로운 드레스는 어린 공작부인을 마치 드레스를 입은 비스크 돌처럼 보이게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위축되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리고 불행한 여왕처럼, 언젠가는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 군림할 듯 보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무라사키노우에는.

나는 바이올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뻘은 될 듯한 부인들 사이에서, 역시 조금은 어색하게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살짝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온화한 표정으로 바이올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헬리오스 공작부인.”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부인의 드높으신 명성에 대해 많이 듣고, 사교계에 나오기 전부터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어머, 나에 대해서?”
“예, 맏이이신 황후 폐하부터, 곧 황태자 전하와 혼약하실 막내 따님에 이르기까지, 서룬도라스 가의 따님들이 기품있고 학식이 뛰어나며, 여성으로서 일국을 다스릴 만한 기량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들었지요. 그리고 딸은 그 어머니의 거울이라 합니다. 여섯 따님을 훌륭하게 키워내신 공작부인의 명성을 모르고서야, 어찌 이 제국 사교계에 명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딸들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자, 어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렛을 환대했다.

“이쪽은 에르도스 공작부인이랍니다. 그대도 알고 있지요?”
“예,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지만, 위스테리아 후작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르도스 공작부인.”

바이올렛은 다시, 에르도스 공작부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후작께서 누님께 안부를 전해주십사 제게 당부하셨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아이도 공작부인을 잘 부탁한다 내게 당부하였지요. 내 동생의 조카라면 내게도 친조카와 같으니, 사양 말고 나를 어머니나 고모처럼 여겨 주세요.”

이곳의 관문이라 할 만한 두 공작부인 – 내 어머니와 에르도스 공작부인이 환대하자, 다른 부인들도 차례차례 바이올렛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곧 포이닉스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고,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아직 결혼하지 않은, 공작가의 막내딸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만한 무언가를 갖지 못한 이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점이, 바이올렛에게는 내심 안심이 되는 일일 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나보다 나이 어린 공작부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섯째 따님의 명성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기뻐요.”
“제가 혼인을 하고 나면, 공작부인과 자매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저는 언니들이 한 분 한 분 혼인을 하고 집을 떠나셔서, 늘 쓸쓸했답니다.”

곧 귀부인들이, 이번에는 헬리오스 공작부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한지 어떤지, 헬리오스 공작은 잘 해 주시는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느냐거나, 어느 집안 출신이냐는 예민한 질문을 꺼내는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오늘 주고받은 대화에서 단서를 찾아내어, 어떤 형태로든 큰 그림을 그려보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능숙하고 우아하게, 흠잡히지 않을 만한 대답만을 골라서 내놓고 있었다. 키가 작고 어린아이같은 모습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그는 가장 노련한 귀부인으로 불렸을 거다. 나는 문득, 그렇게까지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걱정한 게 조금 머쓱해졌다.

조금 전에 다시 깨달았지만, 바이올렛 헬리오스 뿐 아니라 내 처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여섯째 따님… 이랬지.’

“겐지 이야기”에서 ‘여섯째 따님’으로도 불렸던 여성이 한 명 있었다.

히카루 겐지는 궁중 사람이고, 정적이라고 한다면 거창하지만, 나름 껄끄러운 관계인 집안들도 있었다. 바로 우대신 가문이었다. 우대신의 맏딸은 덴노의 비로, 홍휘전의 여어라고 불렸다. 그는 겐지의 이복 형인 스자쿠 덴노의 어머니로, 겐지의 어머니와는 덴노의 총애를 다투었었다. 겐지가 관례를 치루고 아내를 맞게 되자, 덴노는 우대신의 경쟁자였던 좌대신 가문의 딸, 아오이를 겐지의 부인으로 삼았다. 자연스럽게 겐지는 좌대신 파가 되었고, 우대신 가문과는 서먹한 관계였다.

그래놓고는 그 우대신의 여섯 번째 딸, 오보로즈키요와 밀회를 하다가 우대신에게 대놓고 들키지 않나. 정말 한심한 이야기였지만.

‘내가 그 오보로즈키요의 역할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처신을 잘 해야 한다는 이야기지.’

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며, 이곳의 귀부인들,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 사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문과 평판이라면, 내가 처신을 아무리 잘 한다 해도 그 소문과 평판 때문에 나를 헬리오스 공작과 엮으려는 이들도 나타날지 모른다.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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