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세상에야 딱히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나는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로 빙의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면 뭐, 이 화려한 꿈은 모두 캠퍼스 후문 쪽으로 통하는 골목길에서 괴한에게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가, 그대로 죽어가며 꾸는 꿈이든가. 운이 좋다면 중환자실에서 꾸는 꿈이겠지. 사실 이쪽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번역 일을 하고, 강의를 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논문을 쓰면서 살아왔어도, 그런 것 따위는 발정난 성범죄자에게는 아무런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냥 그날,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때리고 쓰러뜨려, 풀숲에서 옷을 벗기고 강간하던 일은, 내가 평생 집에서, 교실에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대학에서, 회식자리에서, 수도 없이 겪어 온 “김 선생, 별 거 아니지?”의 확장증보판 비슷한 거였다. 멀쩡한 사람을 그냥 사물 취급하는 것. 멀쩡히 지나가던 사람을 습격하고 때리면 안 된다는 것, 사람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정신을 잃었으면 119에 신고해서 적절한 도움을 받게 해 줘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남의 몸을 마음대로 해선 안 된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한 윤리 따위,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사람을 강간 한 번 하자고 돼지발정제부터 마약까지, 다양하게도 먹이려 드는 거겠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빈틈만 보이면 더듬으려 하고 빈틈을 안 보여도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성적인 발언을 쏟아붓던 이들을, 그러면서도 웃어주기를 바라던 이들을 생각했다. 그런 일을 대범하게 넘겨야 현명한 사람이라는 듯이 말하던 그 몰염치함들을, 미친년처럼 하나하나 다 신고했어야 했는데.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숫자가 하필, 신고를 한다고 바로 달려오지도 않았던 112라는 것이 한심하고 비참했지만, 달리 생각할 여유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이 세계로 넘어왔던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로맨스 판타지로 빙의하는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런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 뇌가 마지막 엔돌핀을 그러모아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꿈이 이런 거라고. 어느 쪽이든 이런 세계에 떨어진 이상, 나는 이 이야기가 내가 읽었던 수많은 소설들 중 어느 세계의 조각인지 빨리 찾아내서, 어떻게든 무난히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원작에서 반드시 처참하게 죽는 캐릭터라면 가급적 원작을 비틀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원작대로 세상이 평화롭게 흘러가기를 바라면서.
그랬는데…
“레이디 다이애나 서룬도라스.”
“안녕하세요, 에일윈 후작부인.”
“헬리오스 공작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던가요?”
“아뇨, 아직… 저는 이제 사교계에 갓 데뷔한 처지라, 어머님과 교분이 있으신 분들 말고는 사실 잘 모르는걸요.”
“그래요, 레이디 다이애나야말로 이번 시즌의 모범이 될 만한 아가씨죠.”
어머니의 친구인 에일윈 후작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못마땅한 듯 부채를 펼치며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헬리오스 공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조금 이른 이야기지만… 레이디 다이애나가 황태자 전하와 혼인하시면, 헬리오스 공작가와도 일가가 되시지요. 사적으로는 폐하의 아들이고, 공식적으로는 폐하의 종질이 되시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에일윈 후작부인이 하려는 말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았답니다.”
“아아, 예… 사교계 데뷔와 함께 결혼하시는 경우도 가끔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도 헬리오스 공작과 정혼하셨던 분이면…”
“지금 그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에일윈 후작부인이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접더니, 머리가 아픈지 그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다시 부채를 펼쳐, 입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내게 다시 이야기했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서도 품위가 있으셔서, 따님께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하진 않으셨겠지만… 저 여자는 레이디 다이애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단 말입니다.”
두 살?
지금의 내가 열여섯 살이니까…
“열네… 살이라고요?”
“소문도 못 들어 본 모양이군요. 하긴, 공작가의 티타임에서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열네 살이면… 아직 어린 아이잖아요.”
“헬리오스 공작께서 얼마 전 열네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를 부인으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는 나름 유명하답니다. 물론 귀족 가문에서야 그보다 더 나이 차이가 나는 결혼도 하고, 또 서류상으로는 더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기도 하지만…”
여기가 아무리 여자가 열여섯 살이 되면 성인이라며 사교계에 데뷔하고, 세 시즌 안에 신랑감을 찾아야 하는 세계이긴 했지만, 열네 살이면 그보다도 어리다. 나는 그만, 여기가 로맨스 판타지 세계의 사교계라는 사실을 한 순간 잊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친 것 아니에요?!”
“어머나, 레이디 다이애나.”
“시…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열네 살이면 너무 어리잖아요. 그, 그런데다…”
침착하자. 이런 식으로 시작하자마자 평판을 망쳐 버리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나는 아까 헬리오스 공작 부부를 보았을 때 떠오른 작품, 그리고 지금 에일윈 후작부인의 이야기를 짜맞추며, 얼른 변명할 만한 대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다… 그런 어린 나이에,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않고 혼인을 한 데다… 부인께서 ‘그 여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가문이 유복하고 든든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헬리오스 공작께서는, 혹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아가씨를 강압적으로 부인으로 삼으신 건가요?”
“그런 셈이지요.”
“저는… 저는 그런 일은 참을 수 없어요. 성인이잖아요!”
“헬리오스 공작쯤 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답니다. 원하는 여자는 누구라도 손에 넣을 수 있고요.”
에일윈 후작부인은, 내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분개하자 만족스러운 듯 부채질을 했다.
“헬리오스 공작은 4년 전 레이디 블루벨과 약혼했답니다. 레이디 블루벨 레프트실드가 누군지는 아시지요?”
“예, 황후 폐하의 차석 시녀이신…”
“그래요, 사실 황후 폐하의 시녀라는 영광된 자리는 결혼한 부인들이 맡게 되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황후 폐하께서는 레이디 블루벨이 헬리오스 공작과 혼인하게 되자, 황실의 법도를 몸에 익힐 수 있도록 곁에 두고, 손 안의 구슬처럼 아끼셨답니다.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4년이 지나도록 혼인하지 않았지요.”
“아아…”
굳이 이 세계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파렴치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그 사이에 유학이나 그랜드 투어를 다녀오거나, 학문을 익히거나, 무예라도 닦았거나, 신실하게 종교에라도 매진했다면 남자가 큰 뜻을 품어 혼인을 미뤘구나 하겠지만, 그 사이에 헬리오스 공작이 한 일이란 오직,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에게 마수를 뻗친 일 밖에 없었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은 진정한 반려를 만났다고 늘 말했기 때문에, 레이디 블루벨은 헬리오스 공작이 말하는 진정한 반려가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답니다.”
“…그럴 리가 없었던 거군요.”
“올해 초, 헬리오스 공작은 갑자기 레이디 블루벨에게 파혼을 선언하더니, 자신의 진정한 반려라며 저 어리디 어린 아가씨를 공작부인으로 내세웠어요.”
에일윈 후작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레이디 로즈마리는 축복받지 못한 사생아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해도 좋으니 폐하의 아들이라고 인정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폐하께서는 직접 인지하지 않고, 대신 헬리오스 공작 가문을 잇게 하셨지요. 그 예전에는 폐하께서 냉정하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저 엽색가가 제위를 탐내어 황태자 전하와 경쟁하려 들진 않으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레이디 블루벨과 파혼하고, 저 아가씨를 공작부인이라고 선언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안 봐도 뻔해서.
“그러면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어느 가문의…”
“흥, 명목상으로는 위스테리아 후작의 조카라고 하지만, 올해 초 까지만 해도 귀족 명부에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요.”
“위스테리아 후작…?”
“아아, 아직은 헛갈리는 것이 많을 테지요.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친정 가문이랍니다.”
“어머.”
나는 입을 가리며 놀란 척 했다. 에일윈 후작부인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다가도,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이름을 말할 때 만큼은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 그냥 사이가 안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사교계의 라이벌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라도…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위스테리아 후작가문은 원래 유서깊고 명망높은 집안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겠어요. 가문의 선조들께 부끄럽지도 않은지!”
“아, 부인… 다른 분들이 들으시면…”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헬리오스 공작의 엽색 행각이야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올해로 공작의 나이가 불과 스물 두 살인데, 그동안 귀한 집 영애들에게 두루 손을 대고 혼인도 하지 않아 수녀원으로 보낸 숫자만도 한둘이 아니고,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큰언니로 황태자 전하께서도 신뢰하시던 수녀원장을 유혹한 일도 있었지요.”
“전 황후 폐하와 자매지간이시면, 에르도스 공작 가문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르도스 공작가도 저 방탕한 공작에게 피해를 입었는데, 공작부인의 친정인 위스테리아 후작가에서 헬리오스 공작에게 아첨하느라 어린 정부를, 후작가의 딸로 만들어버리다니요. 정말 자존심도 긍지도 다 버린 꼴이 아닙니까. 이런 한심한 작태를 보고 있자니, 뭇 평민들이 이 나라의 귀족들을 어찌 생각할까 걱정이 될 지경이에요. 남의 눈이며 귀는 속인다고 하더라도, 하녀들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걱정한다기보다는 무척 신이 난 것 같았지만, 어쨌든 에일윈 후작부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귀족 명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저 소녀가 위스테리아 후작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은, 후작가에서 헬리오스 공작에게 아첨하기 위해 벌인 일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정말로 저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애첩이 낳은 사생아였을 것이다.
뭐, 그런 세세한 설정과는 별개로, 나는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세계의 설정은 바로 “겐지 이야기”였다. 로맨스 판타지적인 배경에서, 로맨스 판타지같은 이름을 하고, 빛나는 히카루 겐지가 태양빛과 같은 찬란한 금발머리를 하고 나타났다고 해도, 이건 분명하다.
1년 넘게 수도 없이 토하도록 괴롭게 쓰고는 통과된 뒤로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아, 이제는 제목도 가물가물한 내 대학원 졸업논문 주제가 바로 “겐지 이야기의 장르문학적 변용” 어쩌고였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