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계급투쟁”의 브래디 미카코가, 자신의 아들이 다니는 ‘구舊 밑바닥 중학교’를 중심으로 차별과 다양성 시대의 청소년들을 다룬 책. 브래디 미카코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영국 남쪽의 브라이턴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아이들의 계급투쟁”을 쓰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공립학교라도 자녀가 다닐 초・중등학교를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다. 경쟁이 붙으면 가까운 순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좋은 학교를 중심으로 집값이 치솟아 부자와 빈자의 거주지가 분리되는 ‘소셜 아파르트헤이트’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저자의 아들은 가톨릭계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는 이민자 자녀들이 많이 다녔고, 인종차별적 발언이 적었다. 반면 백인 노동자 계급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많고, 저자의 아들과 같은 동양인 외모를 한 아이가 차별을 받는 일도 흔했다. 그러다 보니 중산층 영국인과 이민자들은 어떤 학교는 백인 노동자 계급 아이들이 많으니 피하라는 정보를 공유한다. 이민자들은 인종차별을 받지만, 영국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같은 다른 다양성 이상으로 큰 차별을 야기하는 것은 소득이 만들어내는 격차이다.
영국의 지방 도시에서는 ‘다양성 격차’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종의 다양성이 있으면 우수하고 부유한 학교’라는 기묘한 구도가 생긴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지방 도시의 일이라고 말했지만,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오늘, 주한영국대사관 참사관 그레엄 넬슨은 엊그제 영국 역사상 세 번째 여성 총리와 그 내각을 소개하며 “오늘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의 4대 고위 관리직 (총리, 외교장관, 재무장관, 내무장관) 중 백인남성이 없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양성은 현대 영국을 이끌어 가는 진정한 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일면 맞다. 총리인 리즈 트러스와 부총리인 테레즈 코피는 백인 여성이고, 외무장관인 제임스 클레버리의 모친은 시에라리온 출신, 콰지 콰탱 재무장관의 부모는 가나 출신, 수엘레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의 부모는 인도계니까. 하지만 이들은 모두 보수 우파이며, 대처리즘의 수호자같은 이들이다. 한편 가난한 노동계층의 대부분은 백인이다. “차브”에서 묘사된 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계급투쟁”에 등장했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다. 1980년대 이후 영국에서는 인종차별, 성차별, LGBT 운동 등을 통해 인종, 젠더, 성적 지향 같은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중시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대두되었다. 그 시절의 우파란 정채성 문제를 무시하는 이들, 좌파는 그들과 투쟁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이 계속되며, 빈곤과 노동, 계급 경차 문제들이 정체성의 문제에 밀려나 버리고, 마침내 우파가 정체성 정치를 자신들의 가면처럼 뒤집어쓰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번 영국 총리와 그 내각은, 그런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던 대처리즘의 결과로, 고통받고 차별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무상 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한달에 먹을 수 있는 식비에 한도가 있고, 교사는 아이의 무상 급식 계좌를 체크하며 너무 많이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도둑질하는 친구를 타이르던 친구들은 “가난뱅이”, “공영단지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의 쓰레기”라며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교사들은 공부나 클럽 활동도 사치라고, 교복을 살 수 없는 아이들, 기본적인 의식주가 갖춰지지 않은 아이들을 걱정하며 사회복지사 노릇까지 하고 있다. 교육 재정이 긴축되고 교사 수가 줄어들며 저자를 포함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가 학교를 굴러가게 만든다. 긴급한 상황에 처한 학생을 돕기 위해 아동특별보조금의 일부를 떼어 모아놓은 돈으로, 사고를 당했지만 장례를 치를 돈이 없었던 학생의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공영주택지의 가난한 십대 아이들은 마약 운반책이 되었다가 목숨을 잃는다. 예전같았으면 노동자 계급의 마을이었을 지역은, 소득 격차에 따라 분단된다.
일찍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운동을 잘한다고 말하곤 했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가 부자가 되려면 축구 선수나 연예인이 되어야 한다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에게 돈이 없으면 아이도 무언가를 빼어나게 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 현실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너무나 어두워졌다.
그리고 중산층의 온실같은 가톨릭계 중학교 대신, 저자의 아들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 차별과 격차가 얽힌 미묘한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 중학교는 원래 밑바닥 중학교라 불려던 곳이었으나, 교육에 의욕을 가진 40대 중반의 교장이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나오는 아동특별보조금을 이용해서, 연극이나 음악, 스트리트 댄스, 그리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클래스를 만든다. 아이들은 “만국의 좀도둑들이여, 단결하라.”며 노래와 랩으로 감정을 쏟아내고, 학교를 위해 교복들을 모아 수선하는 엄마를 보고, 힘겨운 시기 노숙자를 돕고, 환경 운동을 위해 거리로 나가고 싶어한다. 그들은 시티즌십 에듀케이션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시민으로 거듭나는 방법, 그리고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인 엠퍼시를 배운다. 부모의 소득격차가 아이의 운동능력 격차로 이어지고, 심지어 수영대회에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서로 다른 풀사이드를 쓰며 대놓고 차별을 당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가난한 공립학교 출신 학생으로서 대회에서 승리하며 자신들의 계급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는 소년도 있다. 이 지역에서도 눈에 뜨는 동양계는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그 마을의 중국집 장남은 의사가 되고, 차남은 대학생, 삼남은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 된다. 저자는 중국계 학생회장을 보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낀다. 무의식중에 느낀 소속의식이자 동료애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일본에서는 ‘가이진’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칭크’라고 부르니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거야. 그래서 나에게도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이 없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는 나한테는 괴롭힐 것도 지킬 것도 없어. 나쁜 점도, 좋은 점도, 없어.”
낙인이 찍히고 차별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특정한 그룹에 소속되었음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비슷한 이들에게 동료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런 소속 의식 역시 강화되면 사회 분열을 일으킨다. 양육자가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그 과정을 밟으며, 저자는 아들이 겪는 좌절과 고민, 슬픔, 주변화되는 감정을 나눈다. 이 책의 제목인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중학교에 진학한 아들이 자신의, 영국인이고 어머니를 닮아 동양계의 외모인 자신의 분노, 혼란, 우울을 담아서 썼던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의 끝부분에서 그 우울한 빛깔은, 청춘의 빛깔이자 뒤섞인 빛깔, 그리고 아들과 친구들이 거리로 나가려다 좌절된 지구온난화 대책 시위와 맞물리며 그린으로 바뀌었다고 저자는 느낀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이들에게서 버림받고 소외되었어도, 차별과 다양성 사이에서 아이들은 다시 성장한다.
PS)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 못 한 것 하나.
저자는 아들의 학교에 전학 온 아프리카계 여학생이 전학왔으며, 이후 학교에서 여성 할례에 대한 교육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학교 바자회에서 그 여학생을 보았을 때, 저자는 먼저 알은 체를 하지 않는다. 몇 학년인지, 담임 선생님이 누구인지 묻고 그 다음에 우리 아들과 같은 반이구나 하고 말한다.
대화에 이런 절차가 필요한 것은 다짜고짜 “얘, 우리 애랑 같은 반이지? 아들한테서 네가 전학을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학생을 처음 만나는 내가 대번에 알아본 것은 ‘아들에게서 흑인이 전학을 왔다고 들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내비치는 발언은 정치적 올바름으로 판단했을 때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다문화 사회에는 곳곳에 지뢰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