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복선에 대해 배운다. 앞부분에서 깔아놓은 떡밥을 뒤에서 회수하는 것이라든가, 수미쌍관적인 글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해. 하지만 실제로, 글에서 앞부분에서 깔아놓은 복선을 뒤에서 회수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일간 연재하는 웹소설이 대세인 세상에서, 한 30화 정도에 깔아놓은 떡밥을 210화에서 회수한다면, 쓰는 사람도 힘들고 읽는 사람도 그런 떡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중간중간 계속 상기시켜서 누가 봐도 이건 복선이라고 알려줘야 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당연히 복선이 주는 반전은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왜 나오더라 하고 잠시 고민했었다. 앞부분에 등장한 인물 중 한 명은 중요한 단서를 남기고 어이없이 죽어버리고, 다른 한 명은 대체 왜 나왔는지도 알 수 없이 등장했지만 마지막에 “고난에 처한 숙녀”를 구해내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배틀 총경의 딸 실비아가 겪은 학교에서의 사건은, 이야기의 후반에 그대로 대유된다. 체호프는 1막에 총이 나왔으면 2막에서는 그걸 쏘아야 한다며 복선 회수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는데, 이 이야기는 초반에 흩뿌려놓은 조각들을 전부 회수하며 마지막은 새로운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권 분량 소설의 즐거움을 가득 모아놓은 것 같다.
본 내용은 마치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한다. 유명한 테니스 선수 네빌 스트레인지는 트래실리안 부인의 저택에 아내인 케이와 함께 방문하며, 전처인 오드리를 이곳에서 만난다. 오드리를 예전부터 흠모해 온 토머스도, 케이의 오랜 친구이자 경박한 남자인 테드 라티머도 이곳에 모인 가운데, 네빌은 케이와 이혼하고 오드리와 재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또 다른 방문자이자 범죄 전문가인 트래브스는 과거에 보았던, 치밀한 범행을 계획해 저지른 아이의 이야기를 했다가 그날 밤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트래실리안 부인이 네빌을 꾸짖은 날 밤, 트래실리안 부인은 살해당한다. 트래실리안 부인의 유산은 네빌 스트레인지 부부에게 상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네빌과 오드리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어 케이에게는 상속권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가운데, 이 사건은 상속을 둔 살인으로, 혹은 언쟁에 기반한 것으로, 혹은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일로 의심받는다.
다정하게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하여,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고 느낄 만큼 몰아세워 조종한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진범은 요즘 종종 이야기하는 가스라이팅의 정석을 보여준다. 그의 과거의 행적이나 현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에서는 평범함을 가장한 악의 집요함이 느껴진다. 사실 요즘같으면 사이코패스 같다고 한번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이코패스 같다는 말이 너무 오용되고 있어서 그 말을 쓰기가 싫다. 조금 똑똑한 악당을 천재라고 추켜세우며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식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평범함을 가장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집요하게 타인을 몰아세우고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이 작품의 범인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악을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