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5] 장례식을 마치고

19세기에서 20세기 초, 가장의 죽음과 그 상속을 두고 벌어지는 가족들의 암투에 대한 이야기는 로맨스부터 추리소설까지, 흔하디 흔하다. 일단 이 시대에 유산의 중심은 부동산에 있었다. 특히 영국은 가문의 힘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상속에 있어 장자상속과 한사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상속인은 토지를 팔거나 저당잡히는 데 제약이 있었고, 여성에 대한 상속 역시 금지, 또는 제한되었다. “오만과 편견”에서 베넷 부인이 다섯 딸들을 어떻게든 시집보내려 애쓰던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에게 상속을 금지하는 한사상속에 따라 아버지인 베넷 씨가 죽으면 딸들은 무일푼이 되고, 재산은 친척인 콜린스의 것이 될 테니까. 물론 아들이라고 해도, 작위와 대부분의 재산은 장남에게까지 상속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귀족의 자식은 일단 귀족인 대륙과 달리, 영국의 경우는 작위를 상속받은 자식만이 귀족이고, 나머지는 “귀족 출신”으로 다른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귀족의 아들들이 자기 가문의 가령이 되거나. 군인이나 성직자, 법률가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없는 가장이 세상을 떠난다. 부유한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기를 기대하는 가족들이 모여든다. 여기에 가장이 살해당했을 지 모른다는 가정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19세기, 재산을 노린 가족간의 살인, 특히 독살 사건이 적지 않았던 나머지 그 당시의 대표적인 독약이었던 비소가 “유산 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 까지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꽤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장례식을 마치고”는 제목부터 이런 가장의 죽음과, 그 뒤에 따라오는 상속 문제를 암시한다. 아들이자 후계자인 모티머가 소아마비로 죽고, 가장인 리처드 에버네티는 몇달 뒤 실의에 빠져 급사한다. 그리고 모티머가 살아 있었다면 그 유산을 나누어 받지 못했을 리처드의 동생들과 조카들이 장례식장에 나타난다. 조카들과 남동생인 티모시에게는 유산이 상속되고, 자식이 없이 과부가 된 여동생 코라와 제수 헬렌에게는 분할된 유산을 신탁에 맡겨 연금을 받게 한다. 이런 재산 분할 과정에서, 예술가를 자처하지만 안목이 없고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는 여동생 코라가 한 마디 한다.

“오빠는 살해당했잖아요, 안 그래요?”

찝찝한 기분으로 가족들은 헤어지지만, 곧 코라가 도끼로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코라는 물론이고 리처드도 살해당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코라와 리처드를 살해했을까. 리처드의 유언장 집행인이었던 앤트휘슬은 이 문제를 에르퀼 푸아로에게 맡긴다.

코라가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그림을 두고 벌어진 이 사건의 전말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놀라웠겠지만, 이 트릭이 여러 작품에서 차용된 지금은 그렇게까지 신선하진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은, 여성 캐릭터들에 있다. 진정한 숙녀라 칭송받는 헬렌은 남편인 리오를 잃고 전쟁을 겪으며 사생아를 낳는다. 티모시의 아내인 모드는 야무지고 유능하며 자동차를 비롯하여 기계도 잘 다룬다. 리처드의 조카인 수전은 리처드의 다른 상속자들 중 가장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 애초에 에버네티 가문의 부를 일군 것은 티눈반창고와 무좀약 덕분이었으니, 어쩌면 수전 역시 그만한 사업을 키워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로저먼드는 배우이고 미인이라, 남성 캐릭터들은 로저먼드가 머리가 나쁠 것이라 지레짐작하지만, 로저먼드는 관찰력이 뛰어난 타입이다. 죽은 코라의 말벗인 길크리스트는 가난하지만 교양이 있어 미술에 조예가 깊고 안목도 있다.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형편없다. 티모시는 자기가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횡포를 부리고, 조카인 조지는 돈 문제에서 신용할 수 없는 인물이며, 수전의 남편인 그레고리는 정신적 문제가 있고, 로저먼드의 남편인 마이클은 외도를 한다. 저주받은 핏줄이나 정신병력이 있는 일가가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문제가 있고 평범하게 사이가 나쁜 가족의 사연은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이야기의 트릭과 반전은 이미 고전이 되었더라도, 이와 같은 캐릭터 조형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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