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작 출간이 되지 않아 읽어보진 못했다. 김휘빈 작가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써서 조아라에 연재했던 소설. 생각해보니 황금새의 전설 5부를 조아라에 연재하던 게 딱 그 시기였는데, 그때 보려면 볼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여튼 소문만 들었던 그 소설을, 김휘빈 작가가 최근에 딜리헙에 업로드하면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데뷔 전 작품이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일단 붉은 머리, 가문과 투쟁, 아버지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흑발의 조신한 미남자까지, 추상의 정원의 프로토타이프라는 것이 바로 보인다. 게다가 지난번 미팅 갔을 때에도 다른 회사의 PD님이 김휘빈 작가를 에로틱 로맨스의 거성이라고 꼽았는데, 그 말 그대로다. 중반부에서 갈등이 고조되며 수시로 튀어나오는 기간한정의 에로씬들은 과연 이 작가는 에로씬에 타고나신 분이며 12년 전에도 장인급의 솜씨로 남녀의 에로씬을 여성의 시점으로 쓰던 사람이었구나 하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복상사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
그런데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왜 내가 황금새의 전설을 리메이크하지 못하는지 아주 객관적으로 남 일처럼 들여다보게 된다. 데뷔 전, 혹은 데뷔 초기의, 어렸을 때의 작품이라는것은 대개 굉장히 힘이 넘치는 법이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법. 이 소설도 그렇다. 풋풋하고 에너제틱한 부분에다, 정말 많은 것을 설명하고 가고 싶어하는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이걸 지금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려면 쳐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아예 문장 단위로 손을 봐야 한다. 남의 작품이라면 모를까, 자신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끔찍한 노동량에 견적 없이 혈압이 쭉 오르며 절망하게 될 수준이다. 게다가 남의 작품을 보고 평가하고 수정할 부분을 체크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옛 작품을 손대기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자괴감 들고 괴로운데다 남의 눈에는 오히려 덜 보이는 낡고 한심한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보일 것도 뻔하고. 그러니 제대로 리뷰가 들어오거나, 돈으로 이걸 사줄 회사를 찾지 않는 한 이 중노동을 혼자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
이 이야기는, 일종의 “현자의 돌”과 같은 이야기다. 자신의 본질이 가리워진 채 남자로 자란 유안 카란시스는, 가족을 잃는 시련과, 진한 혈통으로 이어진 붉은 용의 힘을 개방하는 등의 사건을 통해, 그녀의 가문에 주어진 또 다른 호칭, “달의 옥좌의 주인”이라는 이름 그대로 “변화”하게 된다. 마법에서 의미가 있는 “달”은 초승달과 보름달, 그리고 그믐달. 그녀는 엘을 사랑하는 처녀로, 그와 섹스하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성숙한 여자로, 그리고 유산하여 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로 변화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여전히 강하고 고압적이며, 그녀가 백월(륜)과 계약하여 장차 용의 아이를 낳기로 하자 절망한 엘이 자신을 강간하자, 이후 돌아온 엘을 자신이 폭력적으로 강간하고 조롱하며 억압하는 방식으로 복수한다.
출생의 비밀을 지녔고 노예 출신이며 카란시스 가문에 의해 평민의 신분을 얻고, 분가의 이름을 얻게 되는 엘은 사실은 “황금”이자, 유안을 변화시키는 촉매다. (황금은 연금술에서 완전한 원소이지만, 변화하지 못한다.) 엘의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보다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출생의 비밀과 얽힌 카란시스 일족 참살은 읽으면서 예측한 것에서 조금 더 백그라운드가 들어간다. 둘의 앞날은 로맨스 장르의 문법과 상관없이 나아가며, 그 점이 깔끔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독자에 따라 취향이 많이 갈릴 것이다, 아마도.
한편 이 이야기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타고난 출신과 신분, 출생의 비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엘, 자신의 성별과 비밀, 그리고 가문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으며, 가족들로부터 언젠가는 여기서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받는 유안, 그리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드래곤으로, 실은 강력한 힘과 금기, 그리고 그 긴 생명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기 어려운 백월(륜)은 저마다 성장한다. 이 성장과정에서 성체가 되는 백월은 엘과 똑같은 얼굴에 머리카락만 백발인 형태로 변화한다. 사실 순정만화에서 주인공을 두고 두 남자주인공이 경쟁할 때, 흔히 금발(백발)남주와 흑발남주의 대립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똑같은 얼굴에 정 반대의 성격에다 머리카락 색이 흑발과 백발이라니, 정말 작가님 배우신 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설정이다. 게다가 두 남주 중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된 매개는 바로 앞서 말한, 작품 밖에서 바라볼 때는 일종의 현자의 돌에 가까운 주인공 유안이다. (백월은 유안 때문에 엘에게 깊이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니까.) 게다가 이 상황에서 엘에게 “대신 할 것이 있다면 나는 필요없다”는 대사를 주다니, 이렇게 훌륭하게 짠내날 수가 있나.
이 이야기는 물론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랑은 분명 시작할 때는 남매같은 사랑, 지순한 사랑이었는데 보다 보면 사랑과 동정이 베이스에 깔린 소유욕의 대결에 가깝다. “넌 그 녀석을 박제해서 관 속에 넣어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백월의 말은, 유안의 엘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인 동시에, 엘에게 강간을 당했던 유안이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그래서 더 폭력적으로 그를 억압하려 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엘은 여전히 유안에게 “모든 것을 용서받는 사람”으로 남겨둠으로써 이 관계에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게 과거형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더는 용서하지 않게 되었을 때, 유안은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억압들, 남장한 여자라는 비밀과, 가문에 대한 의무와, 심지어는 엘에 대한 자신의 마음까지 모두 두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엘은 모든 것을 떠안은 채 옥좌에 묶인 죄수가 되어버린다. 무척 흥미진진한 소설인데, 개고생과 멘탈박살의 길이며 차라리 새로 쓰는 게 빠를 것이라는 건 알지만, 설명 늘어지는 것만 좀 추려서 최소한으로 손대서 이북 나오면 좋겠다. 아마도 3장부터 시작해서(1, 2장은 회상으로만 처리해도 될 듯) 스피디하게 가도 좋을 텐데. 이야기 자체는 힘이 있으니까.
PS) 에를리는 대사나 행동의 시원시원함이나 묘하게 황금숲토끼님을 떠올리게 했는데 두분이 접점이 있었던가……? (있었을 수도 있다. 글 쓰는 사람 두 사람이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알고보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친한 사이인 경우야 드물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