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묵직한 만화, 라고 이 만화에 대해 리뷰를 남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고, 사실 그 주제 하나에 대해서는 괜찮은 만화였지만, 이대를 감안해도 불편한 구석들이 많은 만화여서 추천하긴 껄끄러운 면이 있다. 2015년에 책으로 묶인 건데, 아마 그 전에 만들어졌겠지. (광우병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볼 때 아무리 빨라도 이명박 집권 후에 나온 책이다. 즉 2008년 이후.) 시대를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불과 10년 전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영 마땅치 않다.
주인공 김태진은 사법고시 합격 후 검사 임용을 앞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동안 산송장처럼 살며 어머니의 짐만 되었던 아버지를 증오하던 그는, 아버지가 칼빈 소총으로 사람을 죽였으며, 죽은 사람이 전 안기부 차장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의 검사 임용이 취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는 아버지가 살인에 쓴 총이 5.18 민주화 운동 때 시민군이 쓰던 소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아버지가 만약 그때의 시민군이라면 언론에 이 사실을 터뜨려 자신의 임용 취소를 번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뒤쫓는 이야기인 것, 아버지가 도청을 지킨 영웅이 아니라 사실은 비겁자라는 것, 자신과 마찬가지로 법학을 전공했으며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던 인물이며, 시민군을 안기부에 팔아치운 밀정이었고, 그 배신행위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에 안기부 차장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죽게 만들었던 사실 때문에 복수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두 권에 걸쳐 진행하는 것 까지는 좋다. 반드시 액자 속의 주인공이 투사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액자 속의 주인공이 개심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지막까지 비겁한 것, 실패하는 것, 그러면 그때 이미 빈 껍데기가 되었으면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아내에게는 짐밖에 되지 않았던 것, 이런 이야기가 개운하게 끝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까지 다 좋다. 주인공이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그 애비의 아들답게” 개심하는 게 아니라 거의 뒷권 중후반까지 자신의 신분회복에만 열을 올리는 것, 아버지가 시민군이었다고 밝혀내어 언론에 터뜨릴 생각에 골몰한 것도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 그가 마지막에 불법체류자인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움직이는 게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끝까지 요만큼도 변화하지 않는 인물로 내버려두는 것도 곤란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우리는 흔히 영웅담을 원하지만 현실에는 영웅이 거의 없으며, 마지막에 보이는 몇 페이지의 달라진 모습(이 마치 어릴때 방학숙제 독후감 용으로 읽던 반공 프로파간다 만화처럼 느껴지지만)만으로도 사실 현실적으로 이 남자가 변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만화의 불편함은 따로 있다. 주인공이 광주로 내려가는 길, 그는 옆자리에 앉은 동남아시아 계 외국인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지갑이 없어지자 바로 그가 소매치기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갑을 떨어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일단 불법체류자일테니 잡아가겠다는 철도사법경찰관에게 자신이 검사라며(아직 임용되지 않았으며 취소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위세를 부려 그를 놓아주게 한다. 이 외국인 노동자 캐릭터의 작중 역할은, 앞부분에서 주인공의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불법체류자로서 잡혀 재판을 받게 되어 주인공의 개심을 보여주는 장치이고,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이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언급이 아주 짧게(두컷쯤) 나온다. 그게 다다. 솔직히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 빼 버려도 이야기 흐름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 외에는 차에서 자료가 든 라면박스를 꺼내 나르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얼굴은 “해당 그림체 안에서 코드화된 순박한 얼굴”이며, 그의 대사는 유아어, 또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대사를 억지로 만들어낸 문장에 가깝다. 사실은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이건 한국어에 서투른 외국인(성인)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 가끔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캐릭터를 웃음거리로 만들 때의 말투에 가깝다. 대체 왜 대사를 이렇게 치지? 살면서 한 번도 외국인 노동자를 본 적 없는 사람이 상상만으로 쓴 대사 같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 인물은 모든 문장에서 1인칭 대명사가 들어갈 자리, 혹은 그럴 필요가 없는 자리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굳이 집어넣는다. 내가 외국어가 유창하지 않다고 해서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들어갈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진 않지 않나……? 게다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외국으로 도망칠 수도, 외국어가 서투를 수도, 불법체류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폭이 적은 것과 말을 3세 유아처럼 구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아니, 사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른 나라로 도망쳐 망명 절차를 밟으려고 하는 사람이 설령 말이 서투르다 한들 매사에 “XXX는 은혜를 갚는다.”같은 식의 문장만을 구사하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문장구조를 단순화하고, 구사할 수 있는 단어의 풀을 확 줄여놓고 썼어야 했다.
나온 지 몇 년 된 만화에 대해, 그것도 민주화운동에 대해 말하는 만화에 대해,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혐오(특히 동남아시아 계열)를 느껴서 더이상 못 읽겠다고 느끼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괴롭다. 참고 끝까지 읽었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런저런 지원사업의 결과물로써 나온 만화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e-book으로 나올 때 한 번은 손을 봤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냥 한숨이 나온다. 그저 읽으면서, 적어도 스토리작가가 붙은 만화라면 스토리작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인물을 만들고 대사를 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