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말

박완서의 말 – 박완서, 마음산책

박완서 님의 소설은 제법 이것저것 읽었는데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좀 뜻밖의 이유가 있는데, 이분은 불행히도 같은 해에 아들과 부군을 잃으셨다. 그리고 여러 여성지에 인터뷰나 기사가 실렸고, “한 말씀만 하소서”가 책으로 나오면서 다시 이 이야기가 여러 번 여성지에 언급되었다. 그때 나왔던 말이, 딸들 중 하나를 잃어도 이렇게 슬플지 모르겠다. 내 아들이 내 인생의 전부고, 신이 여자보다 남자를 우월하게 창조한 것 같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이 인터뷰집의 맨 앞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집이나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여성지를 사서 서로서로 돌려보거나 차 마시러 왔다갔다 하시면서(그때만 해도 아파트의 한 라인에서 그렇게 마치 한 마을 사람들처럼 친하게 지내거나 했으니까)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하는 것을 들었고, 또 미용실에 머리 자르러 갔다가 여성지에서 읽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마치 인생의 진리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은 다들, 자녀 중에 아들이 있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우리 집을 포함해서. 게다가 때는 동서 커피 문학상이니 이것저것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문예상이나 도서관 문학강좌 같은 것들이 생기던 시대였고, 박완서 님은 주부로 살다가 불혹의 나이에 데뷔한 분이었으니, 이 시기에 책 좋아한다는 중년 여성들에게 이분의 말씀이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지 생각해 보라. 으어어어. (한숨) 심지어는 남동생이 집에서 소소한 사고를 친 것을, 그 사고를 칠 때는 집에 있지도 않았던 내가 학교 갔다가 집에 와서 갑작스레 뒤집어 쓰고 혼나다가 이건 부당하다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대드는 와중에도 이 이야기가 마치 무슨 금과옥조인 것 처럼 내 입을 틀어막기 위해 (그러니까 이런 일로 야단치는 부모에게 항의하지 않는 것이 또한 효도인 것 처럼) 나오기까지 했으니, 내가 이분을 좋아할 수가 있었을까. 없지. 그게 뇌리에 박혀 있어서, 이분 소설에서 강하고 세파를 이겨내는 여성이 나오거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중산층 아주머니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는 중산층의 속물적인 이야기라는 소리가 먼저 나왔으며, 하다못해 주인공에게 아들이 있으면 이 주인공도 아들 아들 하는 여자겠거니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이분의 소설에 대해 내심 비뚤어진 마음으로 책을 읽어온 지 어언 25년에서 30년 쯤 지났다.

그분의 따님들 중 한 분인 호원숙 님이 엮으신 이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알았다. 내가 오랫동안 오해했음을.

사실 기득권을 쥔 쪽은 깨어날 필요가 없는 거고요. 남자가 기득권자인 건 확실하잖습니까? (중략) 결국 빼앗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려면 조금 더 슬기롭고 표독스럽지 않으면 안 돼요. 달래지 않아도 주는 사람은 없어요.

라든가

현대사회 속에서 다른 유형의 윤리나 관습 등은 단시간 내에 붕괴하는데 유독 가족 윤리만은 그 변화나 붕괴의 속도가 매우 더딥니다. (중략) 남성들은 분명 기득권자이면서 여성 상위니 경제권을 빼앗겼느니 하는 말들로 여성들을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여성이란 아무리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살게 돼도 남성에 비하여 민중의 자리에 서 있고, 아무리 사랑받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동등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닌 것을 볼 때, 여성 문제를 소설화한다는 건 우리 시대 모든 작가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인데, 정말로 네 딸들보다 아들 하나가 더 귀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지. 다만 자식 잃은 슬픔이라는 것, 참척이니 단장이니 하는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과 그걸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수없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곱씹는 시간 속에서 나온 말이었겠지.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걸 선정적으로 받아적고(여성지에서 그런 대목에만 볼드 적용시키거나 중간제목처럼 활자 키워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어떤 이들은 읽으면서 아들에 대한 편애의 핑계로 잘도 삼아왔다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송구한 일이었는지.

물론 어떤 글들은 나와 맞지 않았다. 십대나 이십대 때 내가 읽었던 이분 소설 속의 어떤 여자들은 너무 낡았다. 아침 드라마 같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대, 90년대에 있었던 페미니즘적인 시도들과, 그런 것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던 청소년 독자에게 낡았던 것이지, 이분의 시대와 이분의 대상 독자들에게는 이게 결코 낡은 글이 아니었던 거다. 이 책 중간의 인터뷰 “그 가을의 하루동안”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가 박완서가 여성 문제에 대한 좋은 글들을 씀으로써 나와 내 동료들을 길러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지영 안 좋아하지만(……) 90년대 공지영 소설은 운동권 소설과 여성문학 양쪽으로 대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세대를 생각할 때, 애초에 내 세대는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세대가 아니었던 거다. 그걸 감안 안 하고, 어릴때 굳은 편견에 의거해서 판단한 부분이 많았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여튼 현재진행형으로 발표되는 소설이라 하여 그 시대에 살아있는 모든 독자에게 동시대의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집약적일 정도로 시대가 빠르게 흘러간 이 나라의 현대사에서는 특히.

읽다가 웃음을 터뜨린 대목도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혁주의 성격을 창조하실 의도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이며 파렴치한 측면을 강조하고 부각한 것인지요? (후략)”
“(전략) 저는 그냥 현실 속의 보통 남자를 그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중략) 일단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은 대개 혁주와 같은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요. (중략) 혁주는 현대 남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혁주를 너무 악인으로 그리는 게 아닌가 싶어 나중에는 좀 애를 쓰기도 했지요.”

창작물 속에서 남자의 현실적인 찌질함이나 이악함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 과장되었다, 너무하다며 항의 들어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반면 묘사된 여성상에 대한 박완서 님의 변은 이러했다.

페미니즘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남자들이 쓴 인기있는 소설의 여성상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이건 남자가 원하고 바라는 여성이다 생각해서 여성의 실제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지요. 남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환상적으로 처리된 것에서 벗어나 실제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주체적인 소설이 바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게 본래 그런 것 아니겠어요. 내 경우 결혼 생활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당하게 되는 경험 이전의 문제의식이 없을 수 없지요. 남자들이 여성 문제를 건드릴 때에는 여성을 자꾸 대상화하게 돼요. 그러나 여성은 체험만으로도 여성 문제를 잘 쓸 수 있다고 봐요.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몇 번 다시 읽으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의 상당부분이 세대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다시 했고. 어쨌든 이분은, 20대 초반에 전쟁을 겪었던 분이다. 말하자면 거의 우리 할머니 세대인 것이다. 그런 분이 이런 말들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 세대로서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고.

사람들은 걸핏하면 여성은 밭이고 남성은 씨라고 비유합니다. 이 비유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나 설사 백번 양보하여 이 비유를 그대로 전제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여성이 분명 밭의 속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여성은 밭이면서 동시에 반쪽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여러 이슈라든가, 문학에 있어서의 페미니즘이라든가, 여러가지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한편으로 그분은 주부셨지만, 그분 따님들은 일하는 여성이었던 것, 그리고 그 시대에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위장전입(!!!!)까지 해 가며 신학문을 배운 신여성이었던 것, 그런 점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지금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도 계속 직업을 갖고 회사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쓰라린 이야기도 있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느낌은 매우 낭패스러운 것이었어요.

당장 대책도 돌파구도 없는 부분들, 나라나 사회나 기업에서 나 몰라라 하는 부분들, 그래서 일을 그만두거나,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의지하거나, 혹은 다른 여성에게 돌봄 노동을 전가함으로써 해결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해석이나 관점에는 시대와 세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문제의식에 대해서만큼은 변하지 않는 부분들이 쓰디쓰기도 했다.

한편으로, 소위 뼈 때리는, 그러니까 뼈아픈 이야기들도 있다. 사실 굉장히 비장한 이야기는 아니고. 앞서 말했다시피 80년대 그 때에, 책 좋아하고 그런 동네 아주머니들이 도서관 문학강좌 같은 것을 들으러 다니시며 글을 쓰겠다, 박완서처럼 데뷔하겠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시기도 했다. 커피문학상 같은 것에 응모하시는 분도 계셨고. 아마도 그런 시대가 반영된 질문과 답변 같았는데.

“요즘 주부들 중에서는 글쓰기를 자기 삶의 새로운 돌파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인 경우가 많은데요.”
“내가 주부들에게 꿈을 줬다는 생각은 해요. 그런데 그게 너무 헛된 꿈이지요.”

너무나 뼈때리는 이야기인데, 한편으로 무척 이해가 갔다.

슬하에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른 주부가 40세에 등단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내심 얼마나 “나도 저만큼은 할 수 있어”하고 착각들을 했겠는가.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만 않아도 양반이지 않았을까. 그냥 주변에 누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만 나와도 자기도 예전에 문학청년이었다거나, 자기가 아이디어를 주겠다며 인세는 반 나누자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사람이 발에 채이는데. 하물며.

그런데 주부는 주부라도요, 저 분은 어릴 적에 한학을 배우고 그 시절에 신학문을 배워서 그 전쟁 시절에 대학에도 갔었던 분이고, 계속 책을 읽었고. 게다가 저 분 데뷔작이 나목이에요 나목.

뭐 그런 거지. 그래서 박완서를 동경하던 동네 아주머니들 커피모임과 거기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늘 삐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분에 대해, 이번에 읽으면서 정말 미친듯이 낄낄거린 게 이 부분이었다. 아아, 그래. 오죽했으면. 정말 오죽하셨으면.

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일이 별로 없어요. 뭐든 의식화해서 기억 속에 챙겨 두죠.

어느정도 차오를 때 까지 기다려야 해요.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중략) 차오를 때 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중략) 아주 절실함 없이 남의 감수성을 빌려오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차오를 때 까지 기다려야지요.

여튼 해당 인터뷰집의 맨 처음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왜 박완서 소설이라면 일단 좀 비뚤어진 마음으로 읽었는지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시작해서, 세대와 시대가 무척 다를지언정 여성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읽다가, 현실 문학중년들을 생각하며 데굴데굴 웃다가 다 읽고 말았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 뭔가 차오르는 게 있는가. 나는 충분히 채우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생각할 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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