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노환이었고, 당시로서는 장수하셨다는 말을 들을만한 연세였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단지 안에서 상이 나면, 단지 구석에 아저씨들이 족구를 하거나 하던 공터에 차양을 치고 거기서 문상객들을 맞았다. 그런 차양을 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그로부터 2, 3년 뒤 부터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으니, 우리 할머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전통식으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거의 마지막 분들 중 한 분이었을 것이다.
우스울 정도로, 임신 기간 내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첫 출산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살면서 죽는 게 무서웠던 적은 거의 없었는데, 첫 출산 직전에는 선생님 댁에 밥 먹으러 갔다가 문득 “저, 죽으면 어떡하죠.”하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참, 몹쓸 짓이긴 했다. 존경하는 어른께 새파랗게 젊은 놈이 죽을까봐 무섭다고 징징거리고 있다니. 근데 그랬다. 정말 무서워서, 일부러 산모사망률 같은 걸 찾아보곤 했다. 확률이야 어떻든 내가 당하면 100%인 것이지만, 이 정도의 확률에 걸려들긴 쉽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몇 번이나 계속. 여튼 지금은 그때 한 번 했던 짓들이니 침착하게 넘어갈 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출산 이후로 종종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여튼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거니까. 노인이 되고, 치매가 오거나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린다면 안락사를 하는 게 옳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게 강요당하는 형태라면 인권의 문제겠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부분이라면 존엄의 문제가 될 테니까.
이 책은, 존엄사에 대한 책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사회 시스템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참고가 될 것 같았다. 여기서는 1. 평온사가 불가능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 2. 재택간호 경험이 있는(그리고 왕진이 가능한) 의사를 찾고, 3. 사후에 대해 미리 의논하며, 4. 평온사가 가능한 시설을 선택하고, 5. 생전 유언을 표명하고, 6. 골절이 있으면 입원하게 되니 낙상 예방에 주의를 기울이고, 7. 구급차를 부르고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은 이후 연명치료와 이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고, 8. 흉수나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9. 24시간 법칙을 이해하며, 10. 완화의료, 호스피스의 혜택을 누릴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읽으면서 계속,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평화롭게 죽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가던 공간 안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평온사, 존엄사를 위해 갈려나가는 노동력은 누구의 것일까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증조 할머니가 쓰러지시고 자리보전을 시작하시면서 엄마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생각한다. 엄마가 할머니의 수발을 드느라 시장도 마음놓고 가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회사를 다니고, 퇴근하고는 취미생활을 하셨던 것도 기억한다. 누군가가 존엄하고 평화롭게 집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의 수발을 드는 것은 그의 아들이 아닐 것이다. 혈연의 인생을 효도로 갈아넣는 것도 아닌, 혈연도 아닌 며느리의 인생이 갈려나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만약에 할머니가 노환을 앓으시면서도 수년간 버티지 않으셨다면, 엄마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의 나와 친정의 관계도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고.
역시 집에서 죽는 존엄사보다는,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오기를 바란다. 가급적이면 사고를 당해서 갑작스럽게 죽는 게 아니라, 적당히 나이가 들었을 때 스스로 삶을 마감할 권리를 얻길 바란다. 평화로운 죽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란 죽으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짜내고 비틀어 착취해도 좋을 만큼 가치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 생각을 계속 했다. 읽는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