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3040이 그랬듯이 나도 학교다닐 때 은하영웅전설에 열광했고, 몇년 전 이타카에서 은영전 전집이 다시 나온다고 했을 때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카드부터 긁은 사람이다. 구 애니는 워낙 방대하고 정식 루트로 들어온 것은 앞부분 일부 뿐이라 학교 다닐때 동아리방 같은 데서 얻어서 보긴 했지만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기 엔딩이라든가 이것저것, 기억에 남는 것들은 있었다. 노트에 끄적였던 팬픽들, 몇 가지는 PC통신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이 블로그에 비공개글로 남아있다. 뭐, 그런 역사가 있었으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30년 전 소설에 설마 다시 입덕할 일이 있겠어?”라고.
그렇다. 휴덕 안하고 꾸준히 흐릿하게 파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 이쪽은 열광적으로 불타올랐다가 지금은 “추억의 작품” 정도로 분류되어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나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봉신연의의 후지사키 류가 은하영웅전설의 신 코믹스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은하영웅전설 Die Neue These”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시간 맞으면 봐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는 애니메이션 티저 이미지가 나왔을 때는 한참 웃기도 했다.

이를테면 키르히아이스 너무 농구하게 생겼다거나.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이 농구나 수영으로 우주전쟁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든가.
목 아래로는 쓸모가 없다는 양 웬리가 어쩐지 사관학교 농구왕일 것 같다거나.
(그렇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쿠로코의 농구”에 나올 것 같이들 생겼잖아요.)
나의 차애캐였던 카젤느 센빠이가 어쩌다가 매스 휴즈(“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가 되어버렸냐. 갑자기 명이 짧아보인다든가. 뭐 그런 망언들을 하며 낄낄거렸다. 사실 농구하게 생긴 캐릭터들을 놀리느라 나의 오랜 최애캐인 오베르슈타인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나오면 보긴 봐야겠다는 생각 정도까지만 헀을 뿐.
그리고 오프닝을 보아버렸다.

이런 잘생긴 남자가 혼자 나와서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로이엔탈인가. 잘생겼네. 하고 생각한 순간.

내 24년 묵은 최애캐가 내 가슴에 빔을 쏴버렸다. (……) 아니, 잠깐만요, 군무상서 오베르슈타인 원수각하. 이건 반칙이잖아요. 제가 아저씨를 좋아하긴 했지만 아저씨는 분명 대체로

이렇거나(제 마음의 표준 이미지 미치하라 판), 아니면

이렇든가, 그도 아니면 어지간한 구립도서관 하나를 채운다는 은하영웅전설 2차창작의 세계에서는 대개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분이었잖아요! 게다가 목소리가 스와베야 세상에. 이쯤되면 은하영웅전설이 아니라 은하농구대전이라고 해도 봐야 했다.
그리고 1화의 마지막 부분,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라인하르트를 가로막는 느긋한 목소리(그것도 스즈무라 켄이치)와 함께 그대로 침몰. 2화에서 1화의 전투를 동맹 시점으로 짧게 보여주며 양 웬리의 승리를 보여주는 시퀀스 내내 숨도 못 쉬고 화면을 들여다봐야 했다. 아이고 제독님, 근데 님 이렇게 잘생기지 않았잖아(……) 이건 무슨 율리안 시점의 동맹군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 “이제르론 기억하고 있습니까”야 뭐야. Sing for me, Angel이냐. 중얼거리며 결국 티빙에 추가 결제를 해 버렸다.
그게 지난 4월 말 5월 초의 일이고, 불행히도 1기 – 원작의 제 1권 암릿처 회전 직전까지 – 가 끝난 지금까지 이 앓이가 끝나지 않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으로, 간만에 픽시브와 아오삼에는 은하영웅전설 2차들이 흘러넘치고, 트위터의 플텍계에서는 대체로 20년도 한참 전에 은영전에 입덕하신 분들이 양 웬리 총수를 외치고 있으며, 입덕하고 10년쯤 되신 분들이 “아니 내가 뉴비라니”하고 있는 뭐 그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20세기의 나쁜 남자, 엽색가, 그러나 미터마이어에게는 일편단심이었던 남자 로이엔탈은 어쩐지 미치하라 코믹스의 몇몇 장면과 함께 “심장없는 중2병” 소리를 듣고 있으며, 라인하르트는 콘돔도 안 쓰는 새끼라고 까이고, 양 웬리는 율리안 없으면 굶어죽을 밥줘충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낄낄거리다가, 동맹군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로보스 원수가 “주무시고 있다”는 말에 몇년 전의 어떤 상황을 떠올리며 표정이 굳었다가, 그린힐은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말고 야수의 심정으로 로보스 새끼를 쏘아 버렸어야 한다는 말을 하다가, 그러다가 어떤 분은 은영전 세계에서도 역사 속에 해당하는 인물을 파시지 않나, 일곱 도시 이야기 덕질을 하시지 않나, 그 와중에 권교정 선생님의 “어색해도 괜찮아”에 당당히 나왔던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의 투샷이 짤방이 되어 돌아다니지 않나. 전중선생이 30년전 학비를 위해 썼다는 라이트노벨 속에 남자 캐릭터들의 끈끈한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 뿌린 떡밥이 얼마나 많은지 21세기의 동인녀가 이길 수 없다는 한탄과 함께 주변의 나이 든 덕들은 지금 장장 석달째 이 미친 동맹군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과, 원작과, 미치하라 카츠미 판 코믹스와, 후지류의 새 코믹스에 이어 심지어 옛날옛적 나우은클 자료실까지 끌어올리며 그야말로 “착즙”을 거듭하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콘텐츠의 힘이란.
PS) 그건 그렇고 남들은 20년 전에도 쇤코프와 양 웬리를(그렇다. 이 두 사람을 굽시니스트는 “사돈어른”이라고 정의했다.) 잘만 엮고 놀았는데 저는 어째서 그때에도, 그러니까 파릇하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오베르슈타인 각하를 꽁꽁 묶어놓고 저 강철 혓바닥에 한시간쯤 매도당하고 싶다♡” 내지는 “오베르슈타인 각하 or 카젤느 중장이 그의 기준으로 일 못하는 놈들 때문에 완전 고통받는 거 보고싶다” 였을까요. 이래서 로맨스 쓸 수 있는 사람은 타고 난다는 것인 모양입니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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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Die Neue These : 24년만의 재입덕” 에 하나의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