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며느라기 – 수신지, 귤프레스

작년 추석 전후 웹툰 중 최고의 화제작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던 이 “며느라기”였다. 직장여성인 민사린이, 결혼하고 처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며느리 도리”라는 것을 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지키지 못한 순간들”로 기억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로 짧게 이어나가는 이 만화는, 만화 포털에 연재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며느라기”처럼 포털을 뚫지 않고 “큰 돈 들이지 않고”도 히트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는 업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자도 안 하고 대박만 내고 싶은 너희는 좀 어디 가서 두부에 코나 박고 죽어라 좀.) 사람들, 주로 여자들은 며느라기가 올라올 때 마다 민사린의 물 없이 고구마 한 박스 주워먹는 것 같은 답답한 행각이나 시 자 붙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고, 민사린의 안전이혼을 기원하며, 심지어 무구영이 길가다 벼락이라도 맞기를 바라게 되었다. 무구영은 그야말로 옛날 옛적 드라마 “아줌마”가 나오던 시절 그 아줌마의 남편인 “장진구”가 온 국민의 샌드백처럼 욕을 먹듯이 SNS에서 욕을 처먹는 캐릭터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 속 남편과 시가가 네이트판에서 볼 수 있는 막장 인간군상도 아니다. 민사린의 시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상식적이고(그렇다, 이 상식적인 것 조차 없는 시부모는 얼마나 많은가) 시어머니도 자신에게 주어진 며느리나 아내로서의 노동을 당연히 여기고 민사린에게도 비슷한 것을 원할 뿐, 기본적으로 자상한 사람이고, 명절에 오지 않고 자기 할 말 잘 하는 맏며느리에게 불편함을 느끼지만 속상해할 뿐 그 문제로 싸우지 않을 정도로는 양보하고 있다. (그게 며느리의 선택이지 어떻게 시부모의 양보가 되느냐는 걸 떠나서, 현실적으로 여기서 언성을 높이지만 않아도 무척 훌륭하고 교양있는 시댁에 속하지 않나.) 민사린과 연애결혼한 무구영은 장남 아닌 둘째 아들이고, 사린을 아끼고 사랑한다. 문제는 결혼을 통해 사린에게 달라진 위치, 며느리로서의 위치를 요구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무구영의 경우에는 자기 형수와 달리 사린이는 착하니까, 사린이와 결혼해서 효도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한국적 효자”라는 것이다. 그런 무구영의 생각은 할아버지 제사니까 민사린이 가서 일을 하면 자기가 “도와주겠다”는 발언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이 정도만 해도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가보다 훨씬 상태가 양호하다. 하지만 민사린은 마치 신입사원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요구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인 순간들을 곱씹는다. 친절하게 자신에게 생선조림의 “무”를 권하던 사어머니를, 무 씨들은 TV를 보는 가운데 여자들은 전만 부치던 제사를, 똑같이 결혼을 통해 이 집의 가족이 되었는데, 사위는 빈둥거리며 놀고 있고 며느리인 자신은 일을 해야 하는 명절의 풍경을, 시부모가 함께 찍힌 식탁 위의 결혼사진을. 그리고 독자들은, 민사린이 겪은 일들과 민사린이 일단 그 모든 상황들을 받아들이던 모습을 보며, 현실에서 이런 압력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받아들였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 만화 자체가 하나의 거울로써 독자들을 비추고, 다시 민사린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심한 일을 겪었다면 마땅히 화를 내야 한다는 하나의 체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읽는 내내, 나 역시 민사린의 안전이혼을 기원했다. 하지만 민사린과 무구영은 이 “시”자 붙은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행복한 커플이고,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정혜린과 무구일 부부와 같은 형태일 것이다. 사실 정혜린(작중에서는 주로 “형님”으로 나오지만, 내가 민사린도 아닌데 굳이 시가 기준의 호칭으로 불러줘야 할 필요는 없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부당한 일에는 거절을 하는, 민사린보다 단호한 인물이다. 하지만 제사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시가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정혜린의 행동은 그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적어도 이런 선택을 무구일이 방해는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싸우든가 이혼했겠지.) 그렇다고 무구일이 가부장제 타파에 적극적인 캐릭터는 아니겠지만, 그는 적어도 무구영과 달리 정혜린이 설명을 하면 알아는 들을 것이고, 불합리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설에 올라온 설날 특집 만화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보수적이고 착실한 장남인 무구일은 그런 점에서 호들갑을 떨어야 할 정도의 정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무구영은, 그나마 깨인 남자인 자기 형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을까? 자기 형수를 보면서 “사린이는 착하니까”같은 생각을 하던 무구영을 생각하면 글쎄, 이 커플의 앞날이 크게 혁명적으로 바뀔 것 같진 않아서 고통스럽다. 그녀가 맞닥뜨린 이상한 나라, 시가라는 이름의 새로운 가족들은 분명 대한민국 평균에 비해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PS) 이 단행본의 비닐커버를 들어올리면, 저 웃고 있는 민사린의 표정이 그야말로 “그려넣은 영업용 미소”라는 것이 밝혀진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훌륭한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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