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7년에 허OO 작가를 위해 썼던 탄원서로, 이 양식의 앞에는 사건번호, 피의자, 수신, 탄원인, 탄원인의 연락처 등이 들어갑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탄원서가 피의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상식을 믿으면서도 좀 걱정을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걸 썼다는 게 알려지면 이런저런 리스크가 생기진 않을까. 그래도 쓸 건 써야 한다고 해서 동참하고, 주변에 탄원서를 부탁해서 몇 장 받아냈어요. (으쓱) 지금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해지목인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제 쏟아지는 일거리들과 하등 상관이 없긴 합니다만.
최근의 #MeToo 운동과 관련하여 이 글을, 만화웹툰계의 일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 고유명사는 적절히 지운 뒤 블로그에 올리자고 당사자인 허 작가님께 연락을 하면서, 제가 그때보다는 좀 더 간이 부었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뭐, 올곧게 싸가지 없는 인생이긴 하지만.
해당 사건은 성추행은 물론, 다른 여러 문제가 겹쳐 있습니다. 제가 초기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 나중에 후회한 부분은 성추행 쪽이 아닌 업무지시에 대한 부분이고요.
가해지목인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되었습니다. 흔히 추행이 일어나고 고발까지의 시간간격이 생겼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이죠. 그건 피의자가 순결무구한 사람이며 일방적인 음해를 당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문화계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법적 처벌을 받겠다”고 말하는 건 대개, “법으로 가봐도 높은 확률로 증거 불충분이 나와 처벌을 안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다행히도 만화가 협회에서 서둘러 이 사람을 제명해주신 덕에, 이 가해지목인이 억울하고도 퓨어하다는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 다행입니다. 협회의 빠른 대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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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의 피해자인 허OO 작가님과 관련인인 김OO, 민OO 작가님은 현재 모두 마감에 시달리며 열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다행이에요. 가해자는 아무 일 없는 듯 버티고 피해자는 업계에서 사라지는 선례가 하나 더 생기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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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일에 대해 듣게 된 것은 2016년 8월 23일, 이 일의 피해자였던 허OO 작가가 포스타입에 고발문을 올리고 트위터로 공유했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은 문학계 성희롱을 비롯하여, 여러 예술계의 성희롱 사건들이 물 위로 드러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만화가라는 직업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토리작가로 꾸준히 활약하는 사람의 수는 더 적습니다. 저는 스토리작가로서 업계의 존경할만한 선배로 알려져 있던 피의자가 저지른 일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은 한편, 김OO 작가와 민OO PD를 통해 사건에 대해 세부적인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제가 허OO 작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1. 탄원인과 피의자, 피해자의 관계
일단 탄원인인 저와 피의자, 피해자와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데뷔 10년차의 장르소설(라이트노벨 및 SF) 작가이자 만화(순정, 추리, 웹툰) 스토리작가입니다. 2011년 여름 피의자의 한XX 문화센터 강의를 수강했으며, 2016년 상반기에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사무실에 책상을 빌려 4개월 정도 작업공간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때 해당 사무실의 계약자 대표가 전XX 작가라 그때 한 번 더 만났습니다. 온라인으로는 SNS 등을 통해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허OO 작가와 함께 이번 일을 폭로했던 김OO 작가와는 SNS로 알고 지내다가 2015년 10월 코미코 작가파티 때 전XX 작가의 소개를 받아 만났으며, 같은 해 11월 만화의 날 행사에서 김OO 작가에게, 전XX 작가와 함께 “로봇XXX”의 작업을 하고 있다며 허OO 작가를 소개받아 알게 되었습니다.
2. 사건과 관련하여 탄원인이 겪은 에피소드
2015년 11월 만화의 날 행사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화가들이 모여 기념식을 하고 인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이때 김OO 작가는 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김OO 작가가 전XX 작가와 함께 스토리를 작업한 웹툰 “XXX”의 후기만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조금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 후기만화에는 전XX 작가와 김OO 작가의 작업 방식이 나와 있었는데, 이는 작가와 작가의 협업관계라기보다는 편집부와 작가의 계약관계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렇다보니, 김OO 작가는 데뷔한지 얼마 안 되어 “트레이닝(신인작가가 제 몫을 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편집자가 피드백을 주어 가르치며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일)”을 받는 신인작가, 전XX 작가는 트레이너 역할을 맡은 편집자의 포지션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협업관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의아해 하면서도, 전XX 작가가 다양한 작업과 스토리텔링 교수법으로 이름이 높은 작가였기 때문에, 선배작가가 신인작가에게 경험을 쌓도록 하는 방식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3. 어시스턴트와 문하생
저는 동료 만화 스토리작가로서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년 전, 2014년 봄 네이버 웹툰 “본XX담”의 작가 정X은 자신의 문하생 두 명을 추행한 죄로 고소당했으며, 한국 만화가협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지금의 이 안타까운 사건과도 매우 비슷한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추행은 입증하기 쉽지 않고, 특히 시간이 지난 뒤의 추행은 더욱 입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많이 고통을 받았지만, 결국 정X 작가는 재판결과 강제추행이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 나타났다는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앞서, 종종 혼재되어 쓰이는 어시(어시스턴트)와 문하생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어시스턴트는 본래 만화가의 화실, 또는 만화 프로덕션(무협작가의 화실에서는 대표작가가 있고, 그 밑에 많은 배경맨, 뎃생맨이라 불리는 어시스턴트가 직원으로 상주하며 분업 체계로 작업하기도 합니다. DC나 마블 등 아메리칸 코믹스가 스토리부터 채색까지 전부 분업된 것과 유사하다고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만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배경이나 뎃생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화를 그리고 싶어합니다. 문하생은 만화가 아직 대학에 정규 커리큘럼으로 들어가기 전, 초보자가 만화를 전문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자, 작가로서는 자신의 만화 기술을 전수하는 동시에 프로 어시스턴트보다 다소 적은 비용으로 아직 견습인 문하생에게 배경이나 스크린톤 처리 등을 맡길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하생은 제자이지만, 자신의 배움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치르고, 처음에는 차비부터, 실력이 쌓여 프로 어시스턴트에 준하는 능력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에 이르기까지 스승에게 노동의 댓가를 지불받습니다. 말하자면 이 관계는 장인과 도제의 관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웹툰이 등장하고, 컴퓨터를 통한 1인 작업이 보편화 되었으며, 대학에서 정규 과정으로 만화를 가르쳐 만화과 졸업생 중 적지 않은 수가 작가로 데뷔하는 작금에 이르러서는 문하생이나 어시스턴트의 수가 많이 줄었고, 그 개념이 혼재되고 있으나, 기본적인 개념은 그렇습니다.
4. 권력과 위계의 문제
물론 중세의 도제는 장인의 허락이 없으면 독립을 할 수도 길드에 가입할 수도 없었습니다만, 현재의 만화가 문하생/어시스턴트는 자신의 실력이 있으면 데뷔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만화 원작 드라마 “중판출래(중쇄를 찍자)”에서도 바로 그와 같은, 원로 만화가의 화실에서 배경을 그리는 한편, 원로 만화가에게서 그림이나 콘티를 배우다가 자신의 만화를 만들어 데뷔하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잠시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총명하고 실력있는 피해자가, 설령 피의자에게 어떤 요구를 받았더라도 무시하고 자신의 작품을 밀고 나가 실력으로 데뷔하면 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어느 정도 고려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피해자는 재능있는 작가이지만, 아직 어린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데뷔 10년차, 30대 후반의 라이트노벨 및 만화 스토리작가입니다. 2017년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만화 6종, 소설 13종을 꾸준히 출간해 왔으며, 피의자인 전XX보다 경력이 짧기는 하나, 미국 도서관협회에서 매년 50여종을 선정하는 “청소년 만화/그래픽노블 추천작”의 목록에 제 만화의 제목을 올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소설로 데뷔했을 때, 저는 몇몇 남성 작가들의 횡포를 겪었습니다. 선배 작가라며,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앞길을 막겠다거나, 밤에 만나자고 연락이 오거나, 혹은 제 책의 표지가 알 수 없는 액체로 젖어 있는 사진을 보내며 “내가 네 책의 여주인공으로 자위를 했으니 너는 이제부터 내 장모님이다”같은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 작가와 지망생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여성 작가는 믿고 거른다(안 본다)”고 말하거나, 여성 지망생을 “그루피”라고 폄하하며 부르는 남성 작가도 본 적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데뷔를 목전에 두고, 혹은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길을 그만두는 재능있는 여성 작가들을 저는 보았습니다. 제 경우 그와 같은 공격들, 성적이고 폭력적인 집요한 메시지와 사진들은 데뷔 후 4년차까지 이어졌으며, 그 무렵 한번은 정말로 작가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가, 경륜있는 편집자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고 그때의 그 여성 작가나 지망생들은 피해자인 허OO 작가처럼 용감하지 못해서, 그 일을 감히 공론화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그때 그 남자 작가들을 직접 거명은 하지 못하더라도 대놓고 비난할 수 있게 된 것은 제가 작가로서 자리를 잡고, 마침내 제 만화가 프랑스까지 수출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피해자 허OO 작가보다 운이 좋았습니다. 제게는 저를 지지해주는 좋은 편집자가 있었고, 저를 응원해 주시는 작가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작가님께서 제가 그런 일로 괴로워할 때 “그런 녀석들은 네 앞길을 막지 못한다. 재능은 피어나는 시기가 있으니, 네게 때가 되었을 때 피어날 것이다.”라고 늘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와 같은 남성 작가들의 추근거림에 대해 속은 상할지언정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제 스승도 아니고, 업계의 선배일 지는 모르지만 제가 책을 내거나 연재하는 매체와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사실 영향을 끼치고 싶어도 직접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으며, 대부분은 별 볼일 없는 작가들로, 아직까지 작가로 활동하기는커녕 잠시 반짝하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확고한 자리에 오른 작가들은 지킬 것이 많기 때문에라도 그런 식으로 파렴치하게 신인을 착취하지도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지질하고 못난 작가들이 이제 막 세상에 나오려는,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던 재능있는 어린 여성 작가를 얼마나 많이 좌절시켰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둘째, 피의자는 경력과 실력, 그리고 인맥을 통해 어느 정도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작가였습니다.
사실 제가 겪거나 목격했던 희롱이나 추행의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가해자의 요구를 들어 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의 피해자인 허OO 작가 역시, “피의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그가 정말로 자신의 앞길을 막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이것은 저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피의자는 앞서 말씀드린 지질한 작가가 아닌, 경력과 실력, 그리고 인맥을 통해 어느 정도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작가였기 때문입니다.
피의자는 오랜 기간 한XX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의를 해 왔습니다. 이미 데뷔한,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던 많은 작가들이 그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강의를 수강하며 피의자와 알게 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또한 피의자는 현재 만화가를 배출하는 커리큘럼을 갖춘 학교로 가장 유명한 XX대에도 강의를 나갔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피의자는 강의를 통해 많은 젊은 작가들은 물론, 그 젊은 작가들을 양성하는 교수들과도 친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신인에게는 권력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한 만화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시간과 수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만화가는 한번에 한두 작품을 진행하는 게 고작입니다만, 스토리작가는 “콘티”라는, 만화로 만들기 위한 이야기와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만화가와 달리 동시에 여러 작품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 경우도,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퇴근 후와 주말에만 작업하는데도 동시에 2~3개 정도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숫자만큼의 편집자 및 PD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즉 전업작가였던 그는 적어도 통상의 만화가의 3배,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은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 작품들의 수 만큼 스토리작가로서 편집자, 또는 PD와 교류했을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전업작가가 아니고 낮에는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저 믿을만한 편집자를 통해 같이 일할 작가를 소개받아 함께 작업하는 식으로 일하고 있는, 어떤 면에서는 인맥관리를 거의 하지 않는 작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저 조차도 인터넷에서, SNS에서, 이야기를 잘 만들거나 동인지나 창작 만화를 그려서 올리는 사람 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에게 먼저 동의를 구한 뒤 제 담당 편집자에게 그런 사람이 있으니 연락해 보셔도 좋지 않겠느냐 넌지시 알려주는 정도의 일은 하고 있습니다. 좋은 작가가 편집자나 PD가 제대로 케어하고 가르치며 정상적으로 작업비를 지불해주는 매체에서 데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데뷔한 작가가 몇 명 있지만, 저는 그게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작가가 데뷔하면 편집자에게 밥을 얻어먹고 오는 정도로 끝내고, 해당 작가는 어지간해선 직접 만나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활발하게 활동하며 만화계의 많은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있는 피의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전혀 권력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번 일에 대해 다른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서 말씀드린 “본XXX”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본XXXX”의 정X 작가가 자신의 문하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폭로되기 얼마 전, 정X 작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본XXXX”의 원화전을 열고 있었으며, 이 시기 함께 파리에서 오프닝에 참여한 작가들 중에는 피의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때 오프닝에 참여한 이들은 정X 작가와 피의자를 포함하여 유명 작가와 만화과 교수 등 면면이 쟁쟁한 이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오프닝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직접 만나뵙지는 않았지만 제자들과 만화계 전반에서 존경할만한 분들로 알려져 계십니다. 다만 그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 친분을 갖고 같은 작업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문하생이었고 아직 경험이 적었던 허OO 작가가, 자신의 스승이자 피의자인 전XX 작가가 정말로 자신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5.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만화 스토리작가로서, 소설가로서,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재능있는 20대 여성을 보았을 때, 그를 깎아누르고 성적으로 착취하고자 하는 이들은 불행히도 생각보다 많으며, 이 관계가 특히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와 같은 위계관계로 만났을 때, 제자이자 부하직원의 입장인 사람에게는 큰 위협이 됩니다. 저는 20대 때 다녔던 회사에서 5년간에 걸친 사내폭력 및 성희롱을 당해왔고, 초반 3년간은 정말 필사적으로 항의하고 고발했지만 가해자에게 손톱만큼의 징계도 돌려줄 수 없었습니다. 좌절감이 들 정도로 막막했습니다. 남은 힘을 긁어모아 회사를 옮기고 나서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만화가 스승과 문하생인 제자는 장인과 도제에 비유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연재하는 매체를 옮기더라도 만화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는 계속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해자가 만화계에서 일정 이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만화계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는 “회사를 옮기는”것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전XX 작가의 작품에 관심이 있었고, 업계의 선배고 워낙 인맥이 넓은데다 SNS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이었기에 때때로 교류했으며, 지금은 이 문제에 관심이 있을 뿐 그의 다른 사생활에는 흥미도 없습니다. 그와 저는 장르도 다르고 추구하는 만화도 가치도 다르기 때문에 그를 깎아내린다고 제게 득이 될 일도 없습니다. 사실은 저도, 제가 이미 자리를 잡을 만큼은 잡아 그와 그의 인맥이 제 앞날을 망칠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업계의 선배가 저지른 잘못을 지적하는 게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탄원서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만약 이게 공개된다면 저도 어느정도 리스크를 지게 되겠지요.
다만 저는 몇 번이나 좌절할 뻔 했던 제 20대를 생각합니다. 그런 추근거림과 성추행, 너를 데뷔시켜 줄 수도 있고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는 뻔한 협박들, 그런 것들 앞에서 좌절했을 다른 젊고 재능있었던 작가들을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네게 재능이 있다면 때가 되면 피어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작가님을 생각합니다. 저는 그 시절을 거치고 어떻게든 자리를 잡은 작가로서, 저보다 어린 작가에게 같은 일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20대 초반, 그 빛나는 시기를 괴롭게 보내야만 했지만,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으니 부디 꺾이지 말고, 자신을 괴롭혔던 스승보다 더 크게 피어나라고요. 대한민국의 법이, 그렇게 꺾이고 좌절한 작가들을 넘어, 이제 허OO 작가와 그 뒤를 따라 올 많은 재능있는 여성 작가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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