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인 “너의 이름은”은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 부터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지만 육아때문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만화가협회 회장 선거 날, 부천 만화박물관에서 작가들을 대상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회장 선거 및 총회에 아이들을 동반하시는 작가님들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날 꼬꼬마를 데리고 가서 저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다. 물론 상영 중 애가 울면 바로 나올 수 있도록, 문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고서.
시골 마을 신사의 딸로, 무녀로서 인생이 결정된 미츠하는 밤이면 전통에 따라 매듭끈을 만들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전통 의식에 따라 신께 춤을 바치고 입으로 쌀을 씹어 봉하여 “쿠치카미자케” 술을 만들어야 하는 자신의 인생에 진저리를 내고 있다. 게다가 몇백년 전 대 화재로 이 마을이 불타면서, 왜 이런 의식을 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소된 채 의식 자체만 남아 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의미도 모르고 이런 일들을 해 나가야 하는데다, 사춘기 소녀에게 남들 보는 앞에서 쿠치카미자케를 만드는 것은 수치심까지 느껴지는 일이다. 결국 미츠하는 “다음 생에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외친다.
그리고 그 이후, 꿈 속에서 도쿄의 남학생 타키가 되곤 한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뒤의 일.
미츠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신사의 사위로 들어왔다가 신사를 떠나, 마을의 촌장이 되었다. 촌장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토착기업과 정경유착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온다. 미츠하는 그런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미츠하에게 여전히 관심이 있다. 대략 여기까지가 미츠하의 배경 셋팅.
타키는 방과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좋아하는 알바 선배가 있는 평범한 남고생인데, 꿈 속에서 시골 여자아이가 되곤 한다. 꿈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며 여자아이, 미츠하와 서로 규칙을 정하기도 하고, 미츠하 덕분에 선배와 가까워지고 데이트를 하게 되기도 했다. 손목에는 매듭끈 같은 것을 감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끈 만드는 장인에게서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은 불분명하다. 사실 이 끈은 미츠하의 머리끈과 같은 것이지만, 몸이 바뀌었을 때는 그 끈으로 머리를 묶지 않기 때문에 타키는 이것이 미츠하의 머리끈과 같다는 사실은 모른다. 여기까지가 타키의 배경 셋팅.
몸이 바뀌기를 반복하며, 미츠하의 세계에서는 곧 혜성이 떨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타키에게는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그 혜성이 떨어진다고 한 날을 마지막으로, 미츠하와 타키는 더이상 몸이 바뀌지 않는다. 타키는 자신이 미츠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츠하와 그 마을을 찾아 떠나지만, 3년 전 지구를 스쳐 지나간 혜성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그 마을을 직격했고, 미츠하와 그 친구들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타키는 자신의 꿈 속에서 미츠하의 할머니가 미야미즈 신사의 성지에 손녀들을 데려가 쿠치카미자케를 두고 오게 하며, 그녀들의 절반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타키는 기억을 더듬어 성지에 찾아가고, 미츠하가 두고 온 쿠치카미자케를 마시고 일어나다가 넘어져 기절하며 미츠하의, 그리고 미야미즈 가문의 기억과 이어진다. 그리고 기적처럼 다시 한 번 미츠하와 몸이 뒤바뀐다. 미츠하가 된 타키는 친구들을 설득해서 발전소를 폭파하고, 마을에 방송을 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촌장인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타키는 자신의 몸에 들어간 미츠하와 만나기 위해 미야미즈 신사의 성지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미츠하와 타키는 조우하고, 사실은 그 전날 미츠하가 타키를 만나기 위해 도쿄에 갔다는 것, 타키의 팔찌는 그때 받은 미츠하의 머리끈이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두 사람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손바닥에 이름을 적어주지만, 서로 적어준 것은 이름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여기까지만 보고 일어나야 했다. 한 시간 넘게 잘 버티던 꼬꼬마가 우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상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다. 적어도 몇년 뒤 타키와 미츠하가 도쿄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나머지는 상상이 가능하다. 발전소나 방송은 잘 될것 같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을 것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는 미츠하를 이해하고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켰을 것이다. 물론 혜성의 조각까지 방향을 틀진 않았을 테니, 고향 마을은 없어졌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겠지만, 적어도 미츠하가 쿠치카미자케나 매듭 끈을 만들며 청춘을 허송하진 않았을 테지.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사람 갈아넣은 듯한 영상미로 혜성이 마을을 날려버리는 장면을 보고 싶었지만(사실 혜성만 떨어지고 끝인지, 마을이 불타 아비규환이 되는 것까지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불가능했다. 육아와 마감 몇개를 같이 하다 보니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도, 그것도 마지막 10분 때문에 다시 본다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가슴에 닿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원래 하던 거니까 해 오던 그런 일들을, 스스로 한심해 하면서도 그냥 전통이고 관습이니까 해 나가는 것들이 간혹 있는데, 그런 구습을 날려버리려면 죽었다 다시 깨어나거나(도쿄의 꽃미남으로 다시 태어난다거나) 그게 아니면 혜성이 마을에 떨어지는 정도의 엄청난 이벤트가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날려버릴 수 있는 게 아니고 어지간한 의지로 떨쳐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갑갑하게도. 나는 그,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손녀들을 억압하고 있는 할머니가 정말 보는 내내 답답했으며 사위가 도망친 것도 이해가 갔다. 내가 못 본 부분에서 아버지의 과거가 조금 더 나왔다는 것 같은데, 보지 않아도 이해가 갔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소년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너에게 달려가는 세카이계 작품이 90년대에서 21세기로 넘어온 모습을 보여준 것인 동시에, 이놈의 왜 지키는지도 모르겠는 구습 따위를 전통이라고 포장해서 자기 앞길을 막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갈 수가 없”지만 여전히 그네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자신을 도쿄의 소년과 몸이 바뀌게 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했다는 판타지로도 읽힌다.
한편으로, 타키가 미츠하와 몸이 뒤바뀌었을 때 가슴을 만진 것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사실 한두번 그러는 건 이해가 갔지만 마지막에, 쿠치카미자케를 마시고 혜성이 떨어지던 바로 그날로 몸이 바뀐, 그야말로 최종 세이브 포인트로 겨우 돌아간 상황에서 가슴을 만지는 걸 보니 대체 남고생이란…… 남고생의 욕망이란…… 이 무슨 색욕마인도 아니고…… (한숨)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절절한 로맨스는 별로 못 느꼈는데, 원래의 타키와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 양쪽이 꽤 구체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는 반면, 미츠하는 의외로 성격이나 행동이 꽤 추상적이라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직도 여자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말하자면 소년 점프의 히로인 정도의 입체감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걸 원했는데. 얼마 전 출판사에서 만화책의 1권도 보내주셨는데, 만화와 소설 쪽에서는 미츠하가 어떻게 다뤄졌는지 다시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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