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고대 이집트나 우리나라의 고구려 고분 벽화는 물론, 동양의 산수화, 기록화, 인물화와 서양 중세의 그림들은, 그림 속의 사물이나 인물을 중요성에 따라 배치하였고, 다양한 방향을 동시에 나타내려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뒤에 있는 것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 오히려 크게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아동의 그림에서 엄마를 아빠보다 크게 그리는 것과 같은 경우로, 신분사회의 계급 질서가 반영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크게 그리며, 실제 시각에서는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한 화면에 함께 그리는 이 방식은 “신의 눈”에서 본 관점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기에 인간의 눈높이에서 모든 선이 수렴되는 하나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시각 재현의 공간으로 재조직하는 원근법이 도입된다. 이는 주어진 공간을 수학적으로 조직하여, 그 안에서 가까이 있는 물체는 크게,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화면 위에 구성한 것으로,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통일성을 이룬다. 이는 사물이나 인물의 중요성이나 신분이 아닌, 합리적인 관찰에 기반하여 눈의 시각 원리를 따르는 방식이다. 이를 “인간의 눈”에서 본 관점이라 하겠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이슬람 전통의 세밀화법에 이탈리아의 원근법이 도입되며, 전통에 기반하여 신의 눈으로 대변되는 세계의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과 인간의 눈으로 대변되는 원근법을 받아들인 자들의 대립과 암투가 살인사건을 계기로 불거져 나오는 과정을 통해 바로 이 두 관점에 대한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인간의 눈”은 보편적인 인간의 지식과 합리를 뜻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눈”을 의미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 속에 반영된 “보는 주체”의 눈높이를 자신의 눈높이로 받아들이며 그림 속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림 속의 시각은 “보는 주체”에 의해 통제된다.
단순하게 생각할 때 이 “보는 주체”는 그림을 그린 화가로 여겨지나, 실은 좀 더 복잡한 권력구조에 기인한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시녀들”은 이 “보는 주체”에 대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녀들”은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시녀들과 난장이들이 서 있고, 뒤쪽의 문 앞에는 호위병이 있으며, 화가인 벨라스케스 본인도 화면 왼쪽, 거대한 캔버스 앞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진정한 “보는 주체”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뒤쪽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바로 보이는 이 거울 속 인물들은 바로 국왕 펠리페 4세 부처다. 그림 속의 벨라스케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화면 밖을 보고 있는 것은,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이 그림이 국왕 부처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신을 찬미하는 종교화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이 주문하는 그림을 그들의 입맛을 반영하여 그리게 된다. 즉 이 “보는 주체”는 화가의 눈이 아닌,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 권력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시녀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그 시선의 주인인 권력자의 시각에 대한 불완전한 복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판옵티콘은, 본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됨을 보여준다. 판옵티콘이란 중앙에 원형의 환한 감옥이 배치되고, 그 가운데에 원형의 감시 탑이 있어, 감시 탑에서는 각 구석구석을 훤히 볼 수 있지만 수용자들은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 감시자 부재 시에도 감시자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는 쌍방향으로 화면이 전송되는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을 통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 세계가 등장한다. 최근 방영된 BBC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는 초반부 그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을 때에도 런던 곳곳의 CCTV를 통해 셜록을 감시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권력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편 오늘날의 현대 미술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마네의 그림들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대두된 “보는 주체”의 또다른 속성을 보여준다.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의 여성들은 모두 화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은 수동적이며, 화면 밖의 “보는 주체”를 응시하고 있다.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화면 밖의 “보는 주체”로, 단적으로는 이들을 돈을 주고 움직일 수 있는 신사 계급 남자를 의미하며, 다시 말해 이들을 “보는 주체”이자 “움직일 수 있는 주체”는 자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본은 마침내 혈통을 뛰어넘는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와 같은 “권력화된 자본의 시선”의 단적인 예는, 우리가 늘 일상에서 접하는 TV 광고로 볼 수 있다. 자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져, 그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이 소비자에게 노출된다. 소비자는 자본의 시각에 맞추어 상품을 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권유받는다.
21세기에 접어들며, 개개인이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자신의 사진이나 영상, 글을 SNS를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대가 대두되었다. 그동안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언론에서 일단 자신들의 시각에서 재단해 낸 사진과 기사들을 보아야 했다면, 지금은현장을 목격한 개개인의 서로 다른 사진과 의견을 보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이때, 많은 SNS 관계망을 가진 사람의 스마트폰은 또 다른 권력의 시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보는 주체”가 권력과 자본과 같은 사회적 강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전환점이 될지, 이 역시도 자본의 영향을 받는 또 다른 매체로 남을지를 판단하는 데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