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완선 님을 SF/판타지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같은 해 모 앤솔로지 때 다시 보았던 것 같고. (순서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무렵 정세랑 작가님이 (이분이 참여한) 모 인디 잡지에 글을 쓰셨고, 나는 그때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그 잡지에 칼럼을 하나 썼다.
심완선 님은 도서관 일도 하시고, 그 잡지 쪽에서도 일하고 계셨던 것 같다. 무척 부지런한 분이었고, 그래서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일을 하고 기여를 하고 글도 쓰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딱 드러나지 않아서. 이를테면 그쪽 관련 일을 두루두루 잘 하시고, 우리 가족의 친구이기도 한 돌균님이 관련 행사 어디에서 일할 때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다니는 것과 달리, 이분은 정말 조용하게 일을 잘 하는 분 같은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여러 인물 중에서 “여자”인 것이 개성인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들은 적 있어서 좀 걱정스러웠다. 그런 식으로 재능있는 여자들이 일은 많이 하고 그 공은 온데간데 없이 녹아버리는 일이야, 살면서 보기도 겪기도 많이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심완선 님은 참 일관된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지만 결코 녹아버리지 않은 채 미래경, 거울, 판타스틱, 아이즈, 에피, 그리고 한국일보 등에 계속 글을 썼다. 한국의 SF는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여성작가들이 반수를 넘기며 이끌어가고 있는 듯한 상황에서, 그는 어떤 이들이 제대로 짚지 못하고 우물쭈물 넘기는/혹은 넘기고 싶어하는 부분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짚으며 균형잡힌 시각의 글을 썼다. 그는 “여자”를 담당하는 게 아니라 “SF에 반영된 여성주의를 제대로 읽고 균형을 잡는” 글을 쓰며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지형도를 계속 그리고 있었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제공한다. 내가 나라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이유는, 이전에는 나인 적이 없었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그가 좀 더 외향적인 사람이었다면, 혹은 어쩌면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이 있는 남자였다면 이보다 훨씬 전에 단독 저작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책이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책 자체는 짧지만, 그의 SF에 대한 사랑과, 오랫동안 길러온 안목이 드러나는 책이다. 여성 작가, 여성 SF, 그 최근의 흐름과 함께 국내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은 글이다. 기쁜 마음으로, 그의 안경으로 들여다 보는 내가 좋아하는 SF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침내 묶여 작은 지도를 이룬 책을 면허시험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신의 말로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 모든 작가님들이 부러워졌다. (비록 나도 참여한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에 대한 언급도 나와 있긴 하지만) 지금도 그의 글은 이 좁은 세계에 또 다른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작은 추가 되고 있지만, 그가 좀 더 중요한 지점들에 접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은 SF 팬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그의 애정어린 평론의 대상이 된다면 무척이나 영광스럽다고 느낄 작가들이 아마도 여럿 있으리라는 것도.
PS) 몇년 전 SF 컨벤션 때 자료집 및 각종 홍보물의 타이틀로 심완선 작가의 정면 사진이 들어갔었다. 그 책에 평론이 실리기도 했고, 작가들이나 적극적인 한국 SF 팬들이야 이 사람이 평론가인 것을 알지만, 그때 그 행사에 구경 온 사람들 중에는 “모델인가” “여자 안드로이드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런 걸 노리고 좀 무기질적으로 찍은 느낌이긴 했다만) 나는 그때 좀, 이 팬덤이 왜 이 사람을 이따위로 소모하나, 화가 났었다. 아마 집에 오는 길에 돌균님한테만 짧게 말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까지 이 걸출한 평론가를 “젊은 여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정도로 취급하려는 건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