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비밀의 부채 – 리사 시, 밀리언하우스

19세기 중국, 후난성의 마을에서 서로 다른 마을에 사는 나리와 설화는 평생 단짝으로 맺어져 우정을 지속하는 “라오통”이 된다.

천진한 소녀들은 자라면서, 발을 졸라매고 전족을 하게 된다. 단순히 발을 졸라매는 정도가 아니라 발뼈가 부러지고 살이 썩어 모양이 뒤틀리도록 압박하는 과정에서, 나리의 여동생은 그만 죽기도 한다. 하지만 발이 크면 시집을 못 가고 노처녀가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고, 나리는 동생의 죽음 이후 이런 여자의 삶에 순응하게 된다.

나리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시집살이를 견뎌낸다. 시어머니가 죽자 마님으로 대접받고, 딸이 태어나자 다시 전족을 시킨다. 세상이 원하는 정숙한 부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나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라오통인 설화와의 우정이다. 설화는 집안이 몰락하여 백정의 아내가 되었지만, 둘의 우정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들의 우정은 남자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문자로, 이 지역 여자들에게 전승되던 글자 “누슈”로 부채에 쓴 편지를 통해 이어진다. 이들은 때때로 어린 시절처럼 만나 절에서 기도하고, 닭고기와 튀긴 토란을 먹으러 간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고, 설화의 집에 놀러왔다가 이 난리로 가족과 헤어진 나리는 설화가 가족들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녀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다 자신 외의 의자매들과 만나 우정을 나누는 것을 보며 배신감마저 느끼고 만다. 집으로 돌아간 나리는 설화를 멀리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싸우고 파국을 맞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리는 오해를 풀고 설화와 재회하지만, 설화는 이미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절, 여기에다 여자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두 여성의 우정과 후회를 다룬 작품. 읽으면서 어릴때 읽던 6, 70년대 소설에 나오던 S언니(수양언니, 에서 온 말이고 문맥상으로 무척 친한 여학생들의 우정과 애정관계로 나오지만 동성애 관계로도 해석 가능) 같은 걸 떠올렸다. 비밀 친구라든가, 여자친구와의 깊은 우정이라든가. 누슈로 쓴 편지에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네가 쓴 말들은 내 마음을 채우고, 우리는 한 쌍의 원앙새가 되겠지. 우리는 강 위에 걸린 다리와 같아.”같은 말에서 느껴지는 말이 그랬다.

안타까운데 무척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고 그런 이야기다. 나리가 자신의 딸에게도 전족을 시키는 장면에서는 좀 화가 났다. 결국 어릴때 그런 일들을 다 겪어 놓고도 자신의 딸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자신은 다 가진 귀부인이 되었으면서도 설화가 고통을 받고, 고통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을 질투하고 있다니. 읽고 있으면 그런 점이 괴롭고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라오통 관계가 동성애의 다른 방향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고, 또 여자들이 압박을 많이 받는 문화권에서 비슷한 신분의 젊은 여자들의 단짝친구 관계를 만드는 이야기를 전에 다른 데서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현실에서 견뎌내게 하기 위한 장치였겠구나,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누슈에 대해 궁금한데, 국내에 달리 나와 있는 책이 없는 것 같다.

 

추가 : 이 책은 2011년에 “설화와 비밀의 부채”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이 버전으로 읽었으면 느낌이 또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리의 시각으로만 읽었던 것 같은데, 제목이 “설화와 비밀의 부채”였으면 설화의 시각에서 나리의 일들을 읽었을 것 같았다. 근데 다시 읽을 용기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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