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기분 – 김인, 웨일북스

사루비아 다방의 김인 대표가 쓴 산문집.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같은 느낌의 짧은 글과, 차가 있는 풍경 사진들이 교차해서 나온다. 그러니까 한 페이지를 넘기면, 한 면에는 사진이, 다른 면에는 짧은 글이 있는 셈이다.

그런 책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운문을 좋아해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고, 드립부터 에스프리까지 재치 넘치는 짧은 글은 굳이 책으로 접하지 않아도 계속 스쳐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는 “쓰기에 아까운 찻잔을 써야 한다”는 글이 있었다. 금이 도금된 찻잔에 차를 마시며 살아있는 한 사치를 누리되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생각하고, 기술이 집약된 얇은 백자잔으로 차를 마시며 왕과 권력자들도 이런 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라는.

쓰기에 아까운 찻잔을 써야 한다. 태생이 가볍고 옹졸하여, 밤이 오기도 전에 벌써 누군가를 멸시하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떠받들다 돌아왔지만, 그럴수록 쓰기에 아까운 찻잔에 차를 마시며, 찻잔의 안팎에 그려넣은 시와 노래를, 고색창연한 무늬와 그림을 찬찬히 감상하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고귀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루비아 다방은 이름만 들었을 뿐 가보지 못했다. 바빴으니까. 또 요 몇년은 특히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 대목을 읽고서, 이 글을 쓴 사람이 내는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아니, 어쩌면 월인공방 사장님과 이 분이 이야기를 나누면 무척 즐거우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전에 나 자신에게 선물하려고 목걸이를 만들 때 월인공방 사장님과 의논하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글이었다. 이 책은 그 글 하나만으로도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 볼 필요가 있다.

PS) 쓰기에 아까운 찻잔을 써야 한다는 글을 읽으면서 한 조에 만이천원 하는 적당한 작업용 찻잔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 이거 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옛 시대의 왕후귀족은 당연히 쓰기에 아까운 비싸고 멋진 찻잔을 썼겠으나, 적어도 그 시대의 글쓰는 사람은 이만한 찻잔을 손에 넣지 못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알라딘에서 책을 살 때 마다 하나씩 묻어온 머그컵이 찬장에 가득하다 못해 아직 상자에서 꺼내지 못한 것이 그만큼이 더 있는 것도, 백 년 전의 글쓰는 사람에게는 상상하지 못한 사치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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