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언, 도플갱어, 출생의 비밀, 뇌가 없는데도 살아있는 사람, 그리고 오컬트적인 사건들.
키워드만 뽑아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키워드를 숨막히게 만드는 것은 역시 하드SF 만화로 독보적인 솜씨를 자랑해 온 거장의 솜씨다. 머릿속이 뇌 없이 뇌척수액만으로 가득찬 사람. 그러나 뇌는 어쩌면 의식을 붙잡고, 방해하고, 쏟아지는 정보를 왜곡하는 구속구였을지도 모른다고 주인공이 깨닫는 과정이 숨막히게 흘러간다. 고작 1권인데도 감탄하게 만드는 전개, 1권만으로도 압도적이라 벌써부터 다음권을 찾게 만드는 만화다.
사실 거인들의 전설이나 2001야화 같은, 지금은 이미 고전으로 꼽히는 작가의 전작들을 읽었을 때에, 서구의 SF을 받아들여 이렇게 소화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도, 연출 같은 면에서 옛날 작품의 예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10대, 20대 독자들이 80~90년대의 만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시대가 변하면 문법도 요소도 변한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전성기 때 구사하던 것에서 그렇게 크게 나아가진 못한다. 하지만 이번 레인맨을 보면서, 연출 면에서도 예스러운 느낌이 거의 없다고 느꼈다. 아, 이 사람이 그때 만들었던 만화들을 나는 일종의 고전으로 받아들여 읽었지만, 그 만화를 실시간으로 봤던 사람들은 정말 충격을 받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멈추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