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고전읽기-018]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세계문학 50

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누가 보아도 모범생인 한스 기벤라트, 그리고 자유로운 예술가와 같은 영혼을 가진 헤르만 하일너.

이들의 관계는 싱클레어와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비슷하게 보이나, 그 결말은 데미안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토끼 키우기를 좋아하고 낚시를 좋아하던 한스 기벤라트, 총명한 그 소년은 아버지와 교장의 강요 하에 쉴 시간을 모두 빼앗기고 공부하게 된다. 사실 그 형식은 의향을 물어보고 한스가 동의하는 형태였으나, 한스는 어린애다. 자신이 공부를 잘 할 때에만 사랑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신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도태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혹시 신학교에 못 가게 되면 김나지움에 갈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한심하다는 듯한 반응을 돌려받은 그 아이에게 무슨 선택지가 또 있었을까.

고등학교 때를 생각했다. 국립대학에 가지 않으면 학비를 주지 않겠다고 하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떠올랐다. 제길.

다행히도, 국립대에 못 가고 학비융자에 허덕거린 나와는 달리 한스는 신학교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내성적인 소년은 기숙사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여 인정받는 것으로 학교에서의 날들을 헤쳐간다. 그런 그의 앞에, 조숙한 천재이자 시인의 영혼을 가진, 신학교의 엄숙함과는 거리가 먼 소년 헤르만 하일너가 나타난다. 그는 풍자하고, 교장이나 교사들의 위선을 비웃으며, 결국에는 신학교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성적이 떨어진 한스는 저절로 그 세계에서 함께 도태된다. 헤르만 하일너는 그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 자신 안의 신을 깨닫고 하나가 된 존재, 압락사스였던 데미안과는 달랐다. 물론 한스 기벤라트 역시, 자신의 영혼을 뒤흔든, 그러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친구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떠난 뒤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 그 자리에서 정점에 오른 나르치스와는 달랐다. 하일너는 자신 하나를 구원하기에도 벅찼고, 한스는 수줍은데다 어른들에게 휘둘리고, 무엇보다도 공부의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런 한스에게 교장은 위선적인 말 한 마디를 건넨다.

 “아주 지쳐 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테니.”

결국 건강을 잃고, 공부에 대한 의욕마저 잃은 한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공장의 견습공이 되지만 몸이 약한 그게 일을 제대로 해낼 리 없다. 신학교를 나온 견습공이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것도 괴롭다. 어느 일요일, 공장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한스는 물에 빠져 죽음을 맞는다. 장례식에서, 어린 시절부터 한스를 귀여워했던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는 교장과 교사들을 가리키며 한스를 죽인 공범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말해 이 이야기는, 동심을 억압당하고 과도한 공부에 짓눌린 청춘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다. 어른들의 명예욕이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하지만 한 가지 더, 이 한스 기벤라트가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무사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성직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헤르만 하일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한스는 자유가 무엇인지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갑하고 두통이 나지만 응당 참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겠지. 그리고 시키는 대로 공부했을 거다. 성실한 학생이니까 어느정도는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한스는 친구가 떠나도 마이 웨이를 가는 나르치스도 아니고, 데미안과의 만남으로 자기 안의 신을 깨워내는, 카인의 표식을 지닌 싱클레어도 아니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저 수줍고 내성적인 나약한 소년이었고, 그런 소년에게 있어 헤르만 하일너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소년과의 만남은 오히려 그의 인생 기반 전체를 뒤흔들고, 자신을 파괴하는 길로 이어졌다. 이 소설 중반부에서, 교사들과 그런 천재적인 학생이 얼마나 곤란한 관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애당초 선생들에게는 하일너의 남다른 천재적 기질이 어쩐지 섬뜩하기만 했다.
예로부터 천재와 선생들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게 마련이다. 학교에서 보여지는 그런 학생들의 몸가짐은 처음부터 선생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다. 천재들은 선생들에게 전혀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불량한 학생들에 다름 아니다. 14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15살에 사랑에 빠지고, 16살에는 술집에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금지된 책을 읽으며, 몰염치한 작문을 쓰고, 이따금 선생들을 조롱어린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한다.
그래서 선생들의 수첩에 금고형을 받게 될 후보자나 선동가로 기록되는 것이다.

학 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그리고 그 교사들은, 도망친 천재 대신 남아있는, 그의 친구를 파괴한다.

한스 역시도 그 폭풍같은 만남의 뒤끝에 휘말려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다. 돌아갈 자리, 모범생이자 우등생이라는 자리는 이미 사라졌고, 헤르만 하일너의 친구라는 낙인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한다. 아, 그래. 교사들 뿐이 아니다. 한스 기벤라트와 같은, 그냥 성실한 아이들에게 있어도 천재이자 시인인 하일너와 같은 아이는, 인생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내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던 열 여섯 살의 나는, 그리고 지금도 나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마이 웨이, 서른 한 살의 나는 여전히, 그런 이유로 천재는 배척되어야 했다는 점을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였다. 내가 천재다, 라는 중2병적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인생들과 꽉막힌 교사들에게, “남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생”은 그런 파국의 씨앗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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