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신인 그림작가를 위한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토리작가 고르기

그림작가 찾는 스토리작가가 저렇게 많은 와중에 옥석을 골라내진 않더라도 말이죠, 그림은 스토리보다 몇 배의 노고가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적어도 똥은 밟지 않아야죠. 자칫 죽어라 한 작업, 고료도 제대로 못 받고, 고생은 잔뜩 하고 욕만 먹는 경우도 허다할 텐데요. 여튼 그런 마음에서, 저도 별로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대충 데뷔한지 9년, 콘티 만들기 시작한 지 7년쯤 되었으니까 아는 것만 간단히 몇 자 적어볼께요.

뭐 가끔은 잉여취급 당하는 건 좀 억울합니다만, 콘티도 못 짜면서 자기가 아이디어만 갖고 있다고 스토리작가 행세하는 사람도 보긴 봤으니까 이해가 안가는건 아닙니다. 기획자 지망생이니 스토리작가 지망생이니 중에는 사실 진짜 열의를 갖고 많은 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적지 않은 수가 “자기는 할 줄 아는 게 없이 머리 노릇만 하고 싶어하는” 분들이라서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밴드 하겠다고 사람 모집하면서 기타, 베이스, 드럼 모집하는 애들. 자기가 얼굴마담 겸 보컬 하고 싶다 이거죠. 그런데 그렇게 얼굴마담만 하고 싶어하는 애들 중 상당수가 악보도 못 본다는 사실. (진지)

그럼 일단. 어떤 작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작가가 적어도 기본적으로 세계관을 만들고 캐릭터를 만들고 그 세계와 그 캐릭터로 이야기를 굴려 나갈 기본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때, 이걸 소설로 푸는 방법과 만화스토리로 푸는 방법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소설도 쓰고 만화스토리도 쓰고 있는데요, 어떤 이야기는 그냥 바로 콘티로 나와요. 어떤 이야기는 소설 초고 형태로 쓴 뒤에 콘티로 나오고요. 스토리의 밀도라든가 장르라든가 내용이라든가 가끔은 기분에 따라서 출력 방향이 다르게 가더라고요. 물론 콘티로 짠 걸 소설로 다시 만들거나 소설 초고로 쓴 걸 다시 콘티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화 스토리를 쓴다는 건, 적어도 콘티를 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시나리오로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그냥 소설 줄글로 넘겨선 안됩니다. 지문이 아니라 대사와 연출이 주가 되니까요. 그래서 적어도 글말과 입말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공간감각도 조금은 있어야 하고요. 컷 안에서 대갈치기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연출력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설령 자기가 연출 잡아서 콘티까지 하지 않고, 시나리오 형태로 넘긴다고 하더라도 콘티를 짤 줄은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분량 가늠을 못 하거든요. 28페이지 그려야 하는데 40페이지 가져와서 욱여넣으려고 그럴겁니다. 그럼 곤란하죠.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처음에! 이만큼이면 28페이지에 들어가겠지 하고 이야기를 끊어놓고 쓰다 보니 이게 60페이지가 넘어갔더라는 처절한 삽질을 한 적이 있어서 알지요!

그 두가지가 안 되면, 그 사람은 그냥 원작을 쓰는 게 빠를 겁니다. 적어도 갖고있는 이야기를 전부 대사와 표정, 연출만으로 바꿀 수는 있어야 하고 분량 가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해요.

자기가 직접 이야기 쓰고 콘티 짜는 만화가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어차피 날려서 써도 자기가 그릴 거니까 상관없어요. 스토리작가는 그림작가에게 그 콘티를 넘겨서 이해시켜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담당님도 설득해야 하고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리든가, 시나리오를 세세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참고로 글씨를 날려썼다고 빠꾸먹은 적도 쿨럭쿨럭쿨럭…… 여튼 협업에 맞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인 그림작가 앞에 나타나는 스토리작가는, 대개는 스토리작가의 이름값만으로도 책을 팔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분이 아닙니다. 7:3이에요. 원작이 따로 있으면 8:2로 잡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습니다. 물론 큰 쪽이 그림 쪽이고요. 어마어마한 슈퍼슈퍼 존잘님이 먼저 컨택해 오신다면 뭐 6:4도 가능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직 신인이신 님 앞에는 그런 슈퍼슈퍼 존잘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스토리작가에게 끌려가시는게 아니라면. 중간에서 조율하고 컨트롤할 편집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면. 그리고 내용이 기승전결 있는 극화라면 이게 대략 몇 화짜리인지. 가능하면 시놉시스 외에 트리트먼트를 받는 것도 방법입니다. 트리트먼트는 각 화별로 나눈 시놉시스예요. 청사진 같은 겁니다. 한 화당 원고지 1쪽 내외로 정리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저는 펌잇이라는 4컷만화와 리베르떼라는 극화를 쓰고 있어요. 펌잇은 캐릭터물이고, 4컷만화죠. 그래서 언제 회사에서 그만하라고 해도 한달만 여유가 있으면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밑밥을 깔아놓았어요. 이쪽은 캐릭터만 튼튼해도 굴러갑니다. 저는 이쪽은 글콘티를 쓰고, 컷 재활용을 적극 추천하고, 필요한 패러디나 구도, 각종 자료가 있으면 사진자료나 그림판으로 대충 그린 컷 구도를 넣어서 보내고 있습니다. 4컷만화니까 가능한 일이죠.

리베르떼는 극화죠. 극화는 전체 시놉시스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각 화 안에서도 작은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가급적 클리프행어면 더 좋으며,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을 때에도 그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편집부와 몇화정도 갈 것인지 의논해 두고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트리트먼트를 만들어 둡니다. 아마도 이 트리트먼트를 보시고, 한 권이 몇 화정도로 묶이는지 예측해 보시면 이 사람이 이걸로 읽을 만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를 제대로 굴릴 수는 있을 것인지 감이 올 것입니다. 그림과 스토리가 나뉜 이상 이건 협업이고, 스토리작가는 당연히 협업에 최적화되도록 협력해 줘야죠.

여기까지 괜찮았으면 콘티를 짤 줄 아는지 보세요. 두번 말합니다. 어차피 스토리작가가 콘티와 연출까지 한다 한들, 스토리작가란 자고로 님이 새빠지게 그려야 할 군중씬을 두고 백지 펼침면에다 궁서체로 “군중”이라고만 쓰고 넘길 작자들입니다. 그럼 적어도 나머지는 납득할 수 있어야죠.

뭐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는 소설로 데뷔했는데 갑자기 너 콘티 한번 짜보라고 하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세달간 꾸준히 혼나고 다시 그리고 그러다보니 졸라맨밖에 못 그리던 사람이 그림이 늘고…..(한숨) 콘티 그려서 보냈더니 “몇페이지 몇번째 컷을 좀 높은데서 바라본 각도로 다시 그려서 보내줘”같은 말이나 듣고 그걸 듣고 또 그리고 있…… 아니 잠깐, 그냥 글로 쓰면 되지 않냐고요. 으아아앗.

여튼 저는 야매로 시작당한 대신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연습장 만화 같은 것 그리는 연습이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콘티짜는 연습이고요. 잘된 것을 공개해 놓으시면 그게 또 포폴이 되는 거고요. 제가 늘 저런 사람과 동시대에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하는 마사토끼님도 그러셨죠! 연습장 만화!!!!! 그리고 완결을 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짧게라도 완결을 내 본 경험이 많은 쪽이 좋아요. 여튼 스토리 작가 하시려는 분도 찾으시는 분도 굿럭♡

가장 좋은 건 뭐, 옆에 그런 걸 할 수 있고 그동안 써 본 연습장 만화도 잔뜩 있는 사람, 가급적이면 소설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짧게라도 연재를 해서 완결을 내 본 경험이 있으며 그 인격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만, 이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친구 잃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보니.

ps) 그리고 자칭 업계에서 끗발 날린다는 스토리작가. 에 쫄지 마세요.

그런 분이 몇분이나 될까요? 사장님이나 편집장님 하시는 분들 계시긴 합니다만 그분들은 진짜진짜 세계로 가는 탑이시고요. 아니, 자기 입으로 끗발 날린다고 할 정도면 그정도는 하셔야죠. 그리고 끗발 날린다고 다른 작가의 앞길까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결정적으로 그렇게 끗발좋은 분이 뭔가 갑자기 쌩신인 앞에 짠 나타나서 나와 손잡고 세계를 제패하지 않을래 하는건 어지간해선 개연성이 글러먹은 일이므로…… 질 봐서 눈앞의 스토리작가가 마음에 안들면 계약하지 마세요. ㅇㅇ 스토리작가와 사이가 틀어진들 그 작가와 틀어지는 거고. 뭐 그가 좀 치사한 자라면 그와 친분있는 자들과도 틀어질 수 있겠지만 세상은 넓고 스토리작가는 많아요. ㅇㅇ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토리작가야 말로 그림 없이는 작품을 완성 할 수가 없음.

진짜로 그렇죠. 아무리 슈퍼슈퍼 우주대존잘이라도 콘티만으로 작품으로 불리는 건…… 뭐 사실 그래서 저는….. 스토리는 내 자캐가 동업존잘님의 손으로 아름답게 뽑혀 나오는 걸 보는 기쁨이 있고 소설은 혼자 뽑아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만 여튼 그렇다고요. 그러니 자신감 갖고 좋은 스토리작가 만나세요.

특히 먼저 자기가 업계의 선배인 척 하면서 집적거리고 추근거리고 성희롱하는 자들 치고 제대로 된 인간은 단 한톨도 없습니다. 기뻐하세요.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톨도 한 마리도 한 낱도 없으니까 그냥 무시하세요. 십년쯤 전에, 저는 만화는 아니고 장르쪽에서 자칭 업계의 선배라는 분이 집적거리고 추근거리고 새벽에 여자 소개해달라, 섹스하고싶다, 술마시자, 모텔 갈 생각 없느냐 등등의 헛소리를 하셨는데요.

그새끼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 흔적도 안 보이네요.

그리고 전 잘 살아남아서 아직도 그새끼의 당시의 필명을 언급하며 두고두고 가루가 되게 까주고 있어요. 혹시라도 먼저 업계의 선배랍시고 집적거리는 놈팽이가 있으면, 그냥 찌질한 인간이구나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요즘 SNS에 작가님들 많이 계십니다. 이상한 계약이 있으면 물어라도 보세요. 그게 쑥스러우면 관련 카페에라도 가입해서 물어보세요. 만약에 성희롱 등을 당한다면 가급적 녹음하고 협회나 관련 카페의 도움을 받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런 놈과 웬수가 되더라도 님은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정말입니다.

ps2) 뭐 썰을 풀었습니다만 저는 만화 스토리작가 쪽으로서의 일도 참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글씨를 휘갈겨 썼다고 빠꾸먹은 일도 한두 번은 아닙니다만, 고생하는 보람이 있어요. 다행히도 같이 일하신 그림작가님들 다들 좋은 분들이셨고. 제가 만들어난 안경미남 자캐들이 지면에 나올 때 마다 좋아서 호흡이 탁탁 막히며 스토리 쓰기 잘했다고 혼자 기뻐하거든요. 아아, 이 욕망에 충실한 인생같으니.


게시됨

카테고리

작성자

댓글

“쌩신인 그림작가를 위한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토리작가 고르기”에 대한 3개의 응답

  1. 꿋꾸 아바타
    꿋꾸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2. 1 아바타

    안녕하세요~ 늦게나마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림작가와 컨택을 하는 중인데, 그림작가가 제 세계관과 캐릭터의 히스토리는 마음에 드는데 협업하긴 힘들겠다고 하면서 제 세계관을 그대로 쓰겠다고 하는 건 어떤거죠..? 1화 콘티까지 그려오라고 했는데 그걸 그대로 쓰면서 나중에 그걸로 금전적 이득이 생기면 그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 같아서요…

    1. Heyjin 아바타
      Heyjin

      그건 무척 적절치 못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런 계약은 하시면 안됩니다. 이쪽의 설정만 빼먹겠다는 이야기예요.

Translate »